고백
00 고교 동창회
오랜만에 나가는 동창회이다. 내 나이 서른이 넘었고 한국을 떠나온 지 10년도 더 되었으니 친구들 얼굴은 가물가물하다. 학교 이미지상 큰 호텔에서 할 줄 알았더니, 작은 레스토랑을 빌려서 한다고 했다. 학년별로 고작 100명이었고, 내가 속한 스페인어학은 한 반뿐이었으니, 아무리 해외에 나가 있었다 하더라도 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을 정도로 동창회에 나가면 서로들 다 알고 있다.
십 년 만에 찾은 동창회에서 보고 싶은 친구는 딱 하나.
류준.
준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성격이 조용하고 소심했던 나는 중학교 때부터 동창이었던 준이와는 고등학교에서도 그나마 친했는데 그게 하필 남자 사람 친구였기에 주변에 시기 질투가 많았다. 우리만 친구였지 사귄다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새로 진학한 고등학교가 살고 있는 곳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라 우리는 늘 함께 버스를 타고 통학하고는 했다. 출출한 오후에 떡볶이나 돈가스를 먹고 집으로 출발하기가 일쑤였다.
한참 옛 추억을 떠 오리려고 하는데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린다.
'오... 왔어..? 류준!'
'류준?!'
두근거린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왜 뛰는 거야.. 나도 모르게 뜨뜨 미지근해진 맥주를 들이켰다. '후..'
"안녕..? 김 이서."
"어? 어.. 안녕. 준아 잘 지냈어? 오랜만이다.. 후.. 앉아"
그 허연 얼굴은 그대로인데... 십 년이 훨씬 지나서 그런 건지 우리가 입은 옷도 머리 스타일도 그때와는 사뭇 다르다. 준이는 직장에서 온 것인지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동창회에 왔다.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준이는 아직 싱글이라고 한다. 결혼한 친구들 반, 싱글인 친구들 반이라 서로들 웃으며 손뼉 치고 좋아들 한다. 12년 전 고등학생 준이는 인기가 많았다. 우리 반에 남학생이 많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 애는 말수가 적고 학교 수업 후에는 보통 농구를 하거나 음악을 듣는 조용한 아이였다. 장난기 많은 다른 남자애들과 달리 우수에 젖은 모습이 꽤나 생각이 깊어 보이고 감성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나도 친구로 지낸 긴 세월이 무색하게 방황하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는 준이를 좋아했다. 소문처럼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 남자 사람 친구로서 기댄 그 애의 어깨가 남자 친구의 어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려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 두고 간 스카프 하나가 보인다. '소지품을 화장실 안에 두고 나가다니...' 분명 동창 중 한 명일 거라는 생각에 스카프를 들고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레스토랑이 아닌 00 고등학교 복도에 서 있었다.
'어.... 교복도 입고 있네.. 이게 무슨..'
저 멀리서 늘 점심을 같이 먹었던 내 친구 지우가 달려오고 있다.
"이서야!!! 너 그 이야기 들었어? 준이가 백은희랑 사귄대. 진짜야? 한번 물어봐 주라 너희 친하잖아"
"아.. 그래? 백은희가 드디어.." 은희는 내가 준이랑 사귀는 줄 알고 1학년 때부터 내 주위를 맴돌며 까칠하게 굴던 아이였다. 그때 복도 멀리서 은희와 준이가 당번이었는지 우유를 들고 있었다.
'아... 류준.. 멋있다. 그때 참 멋있었어..'
'지금이 그때라면.. 이게 꿈이라도..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거잖아..?'
"준이야..."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보고 준이가 은희에게 먼저 가라고 하더니 나에게 다가온다.
"이서야.. 뭐해? 우유 먹을래..? 나 지금 은희랑 우유 배달.. 오늘 우유 당번이야"
"어.. 그래. 오늘 수업 끝나고 집에 같이 가자.."
"그래 후문에서 만나. 거기 떡꼬치 먹고 가자."
"응"
후문에서 만나서 우린 떡꼬치에 볶은 순대까지 한 접시 해치우고 버스를 타러 길을 나섰다.
"벌써 고3인 라니.. 어디 갈 거야? 대학은 정했어?"
"난.. 내신이 낮아서 수능을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아.. 준이 너는 정했어?"
"모르겠어.. 난 이제 와서 이 길이 맞는지 잘 모르겠어.... 머릿속이 복잡해"
"...."
"... 그래.. 근데, 준아. 너 은희랑 사귀는 거야?"
"응?? 아니~~~~ 백은희는 아닌 것 같아."
"아.. 그래, 친구들이 물어봐 달라고 해서."
"뭐야... 그래서... 너는 안 궁금했고..? 하하.. 난 여자 친구는 너 하나면 돼. 이서야."
"어? 나 네 여자 친구야..? 여자 사람 친구 아니고,.?.. 사실은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있잖아.."
"김 이서.. 우리 그 할 말 대학 가서 하자. 다음에 해...."
그때 버스 정거장 옆에서 스카프를 파는 할머니가 보였다.
"스카프 얼마예요? 이거 하나 주세요" 준이는 스카프 하나를 사더니,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어.. 스카프..?"
***
스카프를 받아서 손에 쥐고 보니 나는 다시 레스토랑에 서 있었다.
그런데 검은색 정장을 입은 준이는 여전히 내 앞에 서 있다.
"준아.."
"어.. 화장실 다녀오는 거야? 근데... 손에 쥐고 있는 거.. 내가 어릴 때 준 스카프야?.."
"응?.. 아니 이거.."
"이서야.. 우리 잠깐 밖에 나가서 이야기할까? 할 말 있는데.. 우리 그때 대학가서 할 말 하기로 했었잖아.."
준이가 내민 손이 유난히 크고 따뜻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