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그녀
어제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참을 음악과 술에 내 귀와 몸을 맡기며 즐겼던 것 같다. 이번 주까지 인수인계를 넘기고 나오느라 한 달 내내 바빴다. 12년을 함께 일한 부서 사람들과 코로나19 덕에 회식도 못한 시간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느라 어제오늘 동료들과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등 함께 하는 시간을 보냈다. 어제는 후련한 마음으로 호텔까지 잡아두고 마음껏 마셨는데, 토요일인 오늘은 늦은 오후까지 누워 있다가 이제야 저녁을 먹고 한잔 하는 중이다. 레스토랑도 클럽에도 연말이라 사람들이 꽤 많아, 서울 야경이 한껏 보이는 재즈바를 일찍부터와서 앉아 저렴한 스파클링 와인 중 하나인 MIONETTO의 Prosecco를 한 병을 시켜서 두 잔째 마셨다. 오늘은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자리 건너뛴 곳에 앉은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내가 쳐다보고 있는 줄 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나이는 30대 후반 혹은 40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러면 어떠랴. 그녀는 굵은 컬이 들어간 밝은 갈색 머리에 심플한 검은색 수정의 귀걸이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작은 크리스털인지 다이아몬드인지 모를 반짝거리는 얇은 목걸이를 차고, 오른손 중지와 새끼손가락에는 심플한 은색 반지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 코드는 심플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녀를 매우 눈에 띄게 하였다.
눈빛이 반짝이는 매력적인 여자다.
"저기 여성분에게 한잔 드려도 될까요?" 직원을 시켜 이야기 상대가 필요할까 하고 나는 스파클링 와인 한잔을 따라 그녀에게 보냈다.
"아, 감사합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녀가 답한다. 그녀는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듯해 보였고, 둘 다 드라이한 취향이라 무난할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멀리서 인사를 나누었다.
***
오늘은 나의 최애 멘토이자 선배인 최부장이 사표를 쓴 날이다. 그녀가 리더 했던 프로젝트가 회사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녀는 본인 책임으로 돌리고 나가기로 했던 것이다. 그녀와 나는 팀에서도 각별했고 그녀에게 배운 것도 많은 나였기에 무엇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녀와 함께 일한 나의 30대의 9년은 매일이 힘들지만 그녀 덕에 버틸만했기에 그녀가 사표를 쓰고 나갈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방황을 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우리는 일주일 전에 이미 우리끼리 각별한 송별회를 나누었고, 새로 올 부장은 회사에서 스카우트한 젊은 인재라는 소리에 그녀에게도 다가올 성공을 기원했다. 한참을 서울 야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 이제는 누굴 붙잡고 하소연을 하며, 함께 의논할 수 있을지 앞으로의 회사생활이 걱정되었다.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가 있다. 나이는 30대 후반이거나 더 젊거나.. 에이 모르겠다.
나에게서 남자와 연애를 지운건 벌써 몇 년 된 일이다. 마지막 연애에 신물이 난 이후로는 일에 극도로 몰두했던 것 같다. 온갖 프로젝트는 싱글인 나와 최부장이 맡아 도맡아 한 것 같으니 말이다. 그 덕에 승진도 금방 되었고 성과가 꽤나 높아 지금까지의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니냐 말이다.
그래도 가끔 힘들거나 외로울 때는 남자를 만나볼까 했지만 섣불리 시작될 연애사도 인연도 없었다.
"저기, 옆에 분이 전해 드리라고 하네요. 즐거운 밤 되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저 남자는 와인 한잔 보내 놓고 목례만 한다.
'풋.. 이런 일이.. 뭐지 저 남자... 생각보다 예의 바르고 겸손하네..'
하얀색 캔버스 셔츠에 얇은 남색 면바지만 입은 걸 보니 투숙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재즈음악이 멈추고 '오 홀리 나이트'이라는 크리스마스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아 벌써.. 성탄절이 겨우 3주 남았구나.. 올해도 이렇게 마무리되는 거구나.'
그때 그 남자가 와인잔을 올리며 다시 인사를 한다.
우리는 와인을 한병 더 시켜 자리를 옮겨 함께 마셨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꽤나 많고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와서 우리는 말없이 마시다가, 취한 몸을 이끌고 그의 방으로 올라가 그날 밤을 보냈다.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멋진 야경이 보이는 그 방에서 우린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그와 함께 몇 시간을 보낸 후 새벽에 우리는 헤어졌다.
***
떠나는 그녀에게 이름과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녀는 부드럽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서로에 대해 알 필요가 있겠냐며 키스로 대신했다.
그녀의 눈빛을 보며 말없이 와인을 함께 마시는 시간이 꽤나 재미있었다. 시끄러워도 말하면 들릴 텐데, 말 대신 눈빛으로 말하는 느낌의 그녀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도 나도 취기가 올라왔을 때 그녀는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나갔을 때 나는 계산을 하고 그녀의 옷과 가방을 챙겼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는 그녀를 살펴보기 위해 화장실 쪽으로 갔는데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많이 취했나..'
"괜찮아요?" 살짝 부축했는데 그녀는 나에게 머리를 기댔다.
"잠깐만 이렇게 서 있을게요." 그녀를 부축해서 엘리베이터를 막 탔을 때 반짝이는 그녀의 입술이 보였고 그녀가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이끌리듯 가벼운 키스를 나누었고, 나는 내 방이 있는 11층을 눌렀다.
***
새로 출근하는 회사는 스카우트 제의가 입사 시절부터 있었던 대기업이다. 많은 혜택과 높은 연봉 제의가 있음에도 내가 거절한 이유는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20대 유학시절을 함께 보낸 최라희 가 그 회사에서 오랫동안 좋은 성과로 일하고 있었기에 헤어진 연인인 내가 굳이 한 회사에서 얼굴 맞대고 지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를 사랑했고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녀가 어느 날 고한 이별에 나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녀를 사랑한 만큼 상처도 꽤 깊었던 것 같다.
세 달 전 오랜만에 그녀에게서 전화 한 통화가 왔다.
그녀는 곧 현 회사를 퇴사하고 이직할 예정이라면서 아직도 스카우트 제의가 있고, 원하냐고 물었다.
나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 또한 현 직장에서 차장으로 큰 업무를 모두 도맡아 하고 있는 상황이라 힘든 시기였다. 그녀의 전화가 온 뒤로 일주일이 지나자 그녀의 회사에서 다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같은 업종이고 이쪽 일에서 꽤나 이름값을 올리고 있던 나에게는 흔히 쏟아지는 제안이었기에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나에게 새로운 업무와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는 결심이 선 후 나는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파격적으로 젊은 부장 입사를 결정하였다.
작은 회사에서 일하다가 대기업으로 가서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부담인데 직책이 부장급이라 사실 걱정이 앞섰다. 하필 최라희의 빈자리를 메꾸는 자리라 먹먹했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덜할 텐데 무거운 마음과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길을 나섰다.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차 앞을 스쳐 지나가는 여자가 주말에 만난 그녀와 닮아 보인다.
'설마. 아니겠지'
미리 마중 나온 인사과 직원과 로비에서 만나 출근 절차를 밟은 후 첫 출근 부서인 마케팅팀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마케팅팀 차장으로 나는 그녀의 실질적인 직장 상사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마케팅팀 이지은 차장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검은색 시스루 블라우스에 검은색 실크 정장 바지를 입은 그녀는 깍듯이 본인 인사만 하고 다른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한 후 자리로 돌아갔다.
'아니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모른척하다니..'
나는 그렇게 이상한 하루를 보낸 후 퇴근을 하였는데,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가 그 또랑또랑하고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본다.
나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때 그 눈빛이다. 나를 부르는 매력적인 눈빛.
데이트 신청을 해야겠다. 이 여자라면 나도 다시 사랑이란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
'새로 온 부장이 그 남자라니.. 그렇다고 공적인 업무시간에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잖아. 그냥 처음 만난 사이라고 하자. 어차피 인연이라면 또 만나겠지. 마음이 끌릴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 생기겠지' 하루 종일 무슨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직원 카페에 들렀다가 걸어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치는데 그때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그 남자가 내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나에게 뭐라도 하라고 하는데, 입에서는 아무 말도 안 나온다.
"오늘도 눈빛으로 말하네요. 이지은 씨, 어제오늘 잘 지냈어요? 우리 저녁 식사할까요?"
그가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생각보다 더 부드럽고 근사한 남자인 것 같다.
'이지은! 어차피 손해 볼 건 없잖아...'
내 마음이 나에게 말을 건다.
그에게 다가가라고.
"이지은이라고 해요. 이렇게 다시 만나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