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연인 사이

by 파란선

"재미있었지? 어땠어?" 지훈이가 들떠서 말한다.

"괜찮았어. 너는 어땠는데? 엄청 재미있었나 봐.."

"난 너랑 보면 다 좋지 뭐. 오랜만에 만나서 이렇게 연극도 보고 기분 좋다."

"뭐야. 너 여자 친구가 알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어. 조심해."

"나 지난주에 헤어졌는데. 괜찮아. 우리 저녁 먹고 맥주도 한잔 하자."

"어..? 유라랑 정말 헤어졌어?.. 왜.. 아휴 내가 오늘 저녁도 사고 맥주도 살게!! 내 친구 지훈이 힘내."

"괜찮아. 근데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그래.. 가자... 어...?!"

그때 근석 오빠 옆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 아니겠지?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했는데..'

"혜은아 뭐해 얼른 가자." 지훈이가 나를 억지로 이끌고, 근처 이태리 식당으로 들어간다.

"왜 그래.. 잠깐만 저기 근석 오빠인 것 같은데."

"아니야.. 아까 내가 봤는데 아니야.."


어두운 밤이기도 했고 근석오빠라 생각했던 그 남자는 늘씬한 여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전화를 해볼까'


우선은 지훈이가 이끄는 대로 레스토랑에 들어와 이 집에서 유명하다는 오징어 먹물 탈리 올리니로 만든 알리오 올리오에 페페론치노를 더 추가하여 시켰다. 해물을 좋아하는 지훈이는 바지락이 가득 들어간 봉골레 파스타를 시켰다. 메뉴를 보다 보니 십 년 전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대학시절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남녀 사이지만 스스럼없는 사람 친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녀석도 나도 늘 연인이 있었고, 넷이서 만난 적도 참 많았다. 여행을 함께 간 그때는 둘 다 동시에 헤어진 6월 여름날이었다. 동시에 우린 떠나자라고 외쳤고 파스타를 좋아하는 우리는 무조건 이탈리아다 하며 로마행 직행 비행기를 끊어 관광객이 들끓는 그곳을 피해서 기차를 타고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그리고 포지타노가 있는 이태리 남부로 떠났다.


허름한 나폴리에 내려 기차역에 여행가방을 맡기고, 이상한 홈리스들을 피해 한 시간 넘게 한참을 걸어 올라가 오랜 전통의 나폴리 피자를 판다는 곳에 가서 진짜 피자를 먹던 시간, 급하게 예약한 숙소를 찾느라 저녁 늦게 도착해서 지쳐 바로 잠들었던 소렌토의 밤, 소렌토에서부터 포지타노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바라보았던 멋진 바다와 아코디언으로 음악을 뿜어내는 악사들이 많았던 레몬향이 가득했던 골목길 등 그 시간을 떠올렸다.


"지훈아 우리 나폴리에서 오래된 기차를 타고, 폼페이 유적지를 다녀오면서 더워서 부채질하다가 노란색 해바라기 밭을 지날 때 너무 예뻐서 한참 웃었던 그때 기억나? 우리 그때 참 웃겼어. " 지훈이와 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


"그러게 우리 그땐 몰랐지."

"뭘..?"

"난 그때도 지금도 네가 편하고 좋다. 유라가 그러더라. 우리 둘만 모르고 있다고."

"응..? 지훈아 난 네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말하지 마."

"내가 너 좋아한다고. 내가 왜 그렇게 자주 헤어졌는지 몰랐는데 이제 알겠더라고. 여자 친구는 안 봐도 걱정이 안 되는데 너를 안 보니까 미치겠더라고 그래서 "

"... 너 그래서 한동안 연락 끊은 거였어..?"

"응. 혜은아 넌 어때? 근석이 형과는 좋아?"


그때 근석오빠가 아니라고 믿었던 검정슈트의 그 남자가 시선에 들어왔다.

"어.. 근석 오빠.?"

"역시 너희는 그냥 친구사이가 아니었어.."

근석오빠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친구 만난다고 했는데.. 왜. 오늘 중요한 미팅 있다고 했잖아. 어.. 유라 씨?"

근석오빠 뒤에 빼꼼히 얼굴을 내민 건 지훈의 여자 친구 유라 씨였다. 그 둘은 씩씩거리며 가게문을 열고 나갔다. 상황이 이해는 가지 않았고 지훈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내가 먼저 말해주려고 했는데.." 지훈이는 말을 꺼냈다.

지훈이와 나의 사이를 의심한 유라는 근석오빠를 찾아갔는데, 평소에도 의심이 많았던 근석오빠는 찾아온 유라와 마음이 맞아 어느새 둘이 새로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근석오빠의 의심병에 나도 지쳐있기는 했지만 사실이 아닌 이유로 둘이 의심하고 눈이 맞았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당사자인 나에게 묻지도 않고 알아서 관계를 정리한 놈도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맥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잘됐어 어차피 그렇게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정리해야지."

"맞아! 혜은아. 그런 놈은 잊어버려!" 우리는 이미 취했고, 맥주 500cc를 이미 몇 잔씩 들이켜 정신이 없었다.

대학로에 있었던 대학을 다니며 오랫동안 지낸 자취방도 있었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한참을 마시다가 머리를 벽에 기댔는데 거기에 오래된 낙서가 있었다.

하트 그림 안에 '지훈 & 혜은' 이라 적혀있었다.


***

십 년 전 우리는 지금의 이태리 파스타 집 있기 전에 있었던 실내포차 단골이었다.


"지훈아.. 나 너랑 무슨 관계야..?"

"무슨 관계 기는 우리 친구관계지. 남자 친구, 여자 친구... 너 내 여자 친구 맞지?"

"맞지 맞지!! 마셔~~ 지훈아"

"고마워 혜은아, 너 마음 바뀌면 안 돼.. 뭐 바뀐다 해도 다시만 돌아와. 알았지? 여기 증거 남긴다"

지훈이가 그린 하트 안에 내 이름과 지훈이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래......."

***


우리는 늘 친구 같은 연인이었다.

"지훈아 우리 이제 사람 친구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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