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첫사랑, 그래.. 굿바이
"찰싹"
그놈의 뺨을 때렸다. 때리고 분이 안 풀려서 그의 가슴과 팔을 두 주먹으로 지칠 때까지 때렸다.
정말이지 내 몸속의 수분은 모두 끌어올려내었듯 펑펑 쏟아냈다.
"왜 그렇게 떠나야 했어? 왜 나에게 아무런 말 하지 않았지? 내가 멀 그렇게 잘못한 건데?"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아니 악을 썼다.
"... 미안해. 서희야 네가 그렇게 화가 난 줄 몰랐어.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나는 어렸나 봐. 너를 두고 말없이 그냥 갔어. 서희야..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찌질한 나 같은 놈 잊고 보란 듯 잘 지내. 알았지? .......안녕... 굿바이.."
".... 엉엉.... 흐흑"
아까는 화가 나서 울었던 그 울분이 이제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흐느끼는 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 안녕 내 첫사랑, 그래.. 굿바이"
한참을 흐느꼈던 눈물이 멈추었다.
어두웠던 주변의 불이 켜지고 사이코 드라마 단원들이 내려와서 나를 다독이며 안아주었다.
그렇게 펑펑 울며 쏟아낸 것은 정확히 3년 만이었다.
***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시절의 나는 고작 대학교 4학년이었고, 억지스러운 이별 뒤에 나는 매사에 화가 난 사람인 마냥 보였다. 언제 웃고 즐겁게 지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대학원 공부와 파트타임으로 하던 연구실 일로 오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시간을 누구와도 보내고 있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새로 도전을 했던 심리학 공부와 대학원 입학은 힘들었던 4학년 시절을 딛고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공부가 어렵고 힘들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하지만, 심리학 공부 중 하나가 나 자신을 찾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어려웠던 첫 학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학기가 되었다.
"자 여러분, 잘 지내셨나요? 지금 나눠주는 종이에 익명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두 가지를 적어서 내세요" 나이가 지긋하신 교수님은 흘러내리는 작은 돋보기 안경위로 빠르게 학생들을 훓으시고는 조용히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인기 있는 사이코 드라마 수업을 처음으로 신청했는데, 첫 수업부터 교수님의 요구가 재미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라니. 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지만... 뭐 그게 어렵나' 얼른 재빠르게 썼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 중 두 가지를 골라서 냈다.
"닭발과 남자..?" 교수님은 특유의 굵고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쪽지 내용을 읽으셨다. 조용한 강의실이 울려 퍼졌다. 모두들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내건데, 아니 이게 그렇게 이상한 조합인 거야..? '
"음..이 두 가지를 쓴 사람 누구죠...?"
"네.. 저.저... 전데요.? 김서희입니다." 손을 들지 말지.. 고민하다가 들고야 말았다.
"그래요? 김서희 씨. 나오세요.. 오늘의 주인공이시네요."
'아.. 어쩌지..?'
박사 과정 선배들도 있고 같은 과 석사과정도 꽤 있는데, 이렇게 새 학기 첫날부터 눈에 띄는 게 영 꺼림칙하지만, 교수님 눈에 띄어 어쩔 수 없이 나갔다. 사이코 드라마 수업은 조명이 있고 창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을 가릴 수 있는 커튼이 있는 곳에서 수업이 이루어지는데, 나는 내가 써낸 그 두 단어가 눈에 띄어.. 오늘 그 스테이지에 서게 되었다.
내가 서있는 곳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조명이 나만을 비추는데, 교수님이 담담하고 조용하게 질문을 한다. 한참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모두들 숨죽여 자리를 지킨다. 관객 쪽 조명이 꺼져서 그런지 나를 보고 있는 느낌은 전혀 없고, 나 혼자 서 있다. 이 느낌.. 오늘 아침 그 느낌이다. 눈꺼풀이 무거운 멍한 상태에서 전철에 뛰어올랐고 출근하는 이들이 많아 서 있었지만 3호선 끝쪽 정거장이라 복잡하지 않았던 여유롭고 조용했던 그 시간.
"서희 씨는 지금 어디죠...?"
"지금 전철 안이에요.. 다음이 도곡역이네요"... 말이 저절로 터져 나오고 있다.
"누가 보이나요?"
"그놈이 보여요. 3년 전에 싸우고 나서 나에게 말도 안 하고 미국으로 떠난 그놈이요."
갑자기 주변이 전철안 상황으로 변하고, 내 옆에 졸고 있는 사람, 그냥 서있는 사람, 음악 듣고 있는 사람들로 스테이지가 북적거린다. 정말이지 한 정거장 후인 "도곡"역이 되자 그놈이 보였다.
사이코 드라마 단원들이 모두 가면을 쓴 것인 양 아침의 모든 상황이 재연되었다.
***
그 사람과의 사랑은 분명 첫사랑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대학교 4학년 졸업을 곧 앞두고 그 사람은 미국으로 2년 계획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는데, 3개월도 채 안되어 누나의 결혼식이 있어 잠시 들어왔다. 우리는 사귄 지 일 년 정도 된 사이였는데, 미국에서도 매일 장거리 통화를 할 정도로 잘 지냈다. 오랫동안 못 볼 줄 알았다가 갑자기 만나자 더 애틋해졌다. 그는 나에게 달콤한 사랑고백을 하였고, 나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순진했던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잘 몰랐으나, 나도 그렇다고 그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와 함께 저녁도 먹고 카페도 가고 밤길을 걷다가 그가 이끄는 곳에 도착해 보니 유명한 호텔 앞이었다. 나는 그와 잡은 살짝 빼고, 뒤로 물러났다. 그와 사귀는 일 년 내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오빠, 이건 생각해 보지 못한 건데... 난 준비가 안 되었어. 다음에 하자."
"아까는 좋다고 했잖아..? 왜 그래. 서희야 난 너를 사랑해.. 우리 사귄 지 일 년이 넘었잖아."
"나도 사랑은 하는데.. 이건 잘 모르겠어."
"... 알았어. 그럼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어느덧 다정하던 그 의 목소리가 싸늘해졌고, 그는 그날 저녁 이후 3년 동안 전화도 메일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두 살 밖에 안 나서 그런 것인지 우리는 불 타듯이 서로 너무 좋았다가 또 자주 다투고는 했다. 종교가 달라 일요일에는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장소와 사람들을 질투하고, 학교가 달라 학과 행사 등 여러 가지 오해로 싸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서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늘 내가 먼저 그 사람의 화를 풀어줬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도 않고, 연락도 하지 않는 그 사람이 떠날까 너무 두려웠던 것이다. 평소에도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그는 그의 특유한 입다뭄으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여러 해 동안 사귀었던 그 어떤 남자들도 나에게 이렇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늘 나를 위해 주었고, 먼저 다가와 주었으며, 먼저 사과해 주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내가 참을 수없어 먼저 미안하다고 손을 내밀면 언제 싸운 적이 있냐는 듯 살갑게 구는 그가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이 또한 우리에게 자연스러워졌다.
'우리는 헤어진 것일까. 그날 내가 거절한 것은 내가 잘못한 거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온통 자책과 고통스러움 뿐이었다. 결국 장거리 연애였기에 늘 내가 먼저 하던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날 이후 나는 침묵으로 감싼 이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성난 사람으로 3년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
우리 집과 한정거장 거리에 살았던 그가 3년 만에 그날 아침 도곡역에서 마주친 이후 학교로 가는 내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것인가. 아님 온 지 한참 되었는데 마주친 것인가. 왜 아는 척을 안 한 거지?'
나는 신기하게도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그 남자의 이름과 행복했던 기억을 잃어버렸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 남자를 기억하는 것이 이라고는 나쁜 기억 투성이었다. 오로지 욕할 거리와 화낼 일뿐이었다. 어느 날 친구들이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나를 위로한다고 음식을 사 가지고 작업실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소개팅 이야깃거리와 닭발을 사들고 왔는데, 그때 친구들에게 "남자도 싫고 연애도 싫고 징그러운 닭발은 더 싫다."라고 화내며 말한 적이 있었다. 그날 그 사람과 연애했던 곳들도 행복했던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런데 3년 내내 떠오르지도 않던 그 얼굴을 아침에 마주치자 사이코 드라마 수업 전에도 묵었던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닭발과 남자'로 사이코 드라마 안에서 그를 만나 진짜 이별을 하게 되었다. 내 가슴속에 화가 난 채 묻어버렸던 사랑의 감정이 다시 살아났다.
'... 안녕 내 첫사랑, 그래.. 굿바이..'
사이코 드라마 안에서 엉겁결에 한 굿바이 인사는 나의 아름다운 첫사랑과의 입맞춤, 함께 걷던 거리, 사랑의 속삭임, 그의 이름까지 모두 부활시켜주었다. 그래 이제는 굿바이. 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