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화이트

나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by 파란선

'음.. 커피 향기. 아침에 맡는 이 향기는 매일 맡아도 항상 좋다.' 맛과 향 모두가 근사한 커피 맛집이다.


"미디엄 사이즈 플랫 화이트 3천 원입니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네. 사장님, 저 오늘은 라지 사이즈로 주세요."


오늘은 매일 가던 운동을 가지 않았다. 내가 매일 하는 일과를 크게 나누어 본다면 운동, 카페, 출근, 퇴근인데 그중 운동을 빼고 늦잠을 잤다. 오늘따라 두통이 심하기도 했고 영하의 날씨가 건조하고 뻣뻣한 내 몸뚱이를 이불속 밖으로 끌고 나올 수가 없었다. 서른다섯을 넘긴 이후로 저질체력을 인지하고 겨우 시작한 운동은 이제 7년을 맞이하고 있다. 7년 동안 요가, 러닝, 개인 트레이닝, 에어로빅 등 각종 운동을 시도해 본 결과 요가와 러닝이 맞아 꾸준히 5년을 하다가 최근에는 근육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기구를 이용한 운동을 하고 있다. 어제 무리한 운동 덕에 허벅지와 등이 살짝 불편하다. 운동을 어느 정도 하면 나아져야 하는데.. 나이 때문인지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없다.

운동 안 하는 날은 거의 두통 때문인데 이런 날은 에스프레소의 진한 맛이 가득한 플랫화이트 커피를 두 잔 정도 마셔야 한다.


"라지 사이즈 플랫 화이트 커피 나왔습니다. 오늘은 운동 안 가셨나 봐요...?"

"네..? 어떻게.."

"아 항상 운동 가방 들고 오셨었는데 오늘은 가방도 없고 해서요. 이건 서비스입니다. 커피랑 한번 드셔 보세요. 후기도 부탁드리고요.."

막 구워 따뜻한 미니 스콘 한 조각을 커피와 함께 건넨다. 늘 친절하신 카페 사장님이다. 나이는 아마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고, 오래된 골동품 모카포트, 커피콩 로스팅 장비를 장식해 두시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걸고 있는 분이신 걸 보니 커피에 진심이다. 직접 커피콩도 고르고 로스팅도 한다고 하니 더 믿음이 간다. 이 작은 카페에 매일 오게 된 이유는 맛있는 커피 맛 외에 많은 책들을 소장하고 손님들에게 공유하는 미니 북 카페이기 때문이다. 또한 카페 벽에 멋스럽게 걸려있는 각국에서 찍은 노천카페의 사진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요즘 못 가본 유럽 여행에 빠져든다.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의 향과 따뜻하고 깊은 스팀 밀크가 목구멍으로 넘어오자 안도감이 생긴다. 운동을 하면 근육량이 증가하여 몸 온도가 올라간다더니 내 손은 늘 차기만 하다. 그나마 이렇게 따뜻한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뜨거운 잔을 만지고 있으면 마치 내 몸속의 차디찬 얼음이 녹듯이 마냥 기분이 좋다.

양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안아 마치 한참을 목말랐던 사람처럼 뜨거운 커피를 홀짝홀짝 식기 전에 금방 마셔버린다. 콜라 마시듯. 나는 평소에 디저트도 간식도 잘 안 먹는다. 아니 생각해 보지 못했다. 커피와 무언가를 같이 먹는다는 것을. 스콘 한입을 베어 먹었는데 입안에 가득했던 커피 향이 사라졌다. 대신 버터향이 내 입안에서 몽글몽글 남아 어색하다. 나도 모르게 남은 커피를 입안에 가득 물고 있다가 스콘의 향을 묻어 버렸다.


***

평소에 사람을 만날 일이 많지 않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눌일이 많지 않다.

내가 하는 운동, 출근, 퇴근 모두 혼자 하는 일이다.

혼자 먹는 식사와 커피는 일상이 되었고 이제는 하루 두 끼로 해결한다.

나는 모닝커피를 마시고 나서, 나의 공간이자 일터인 집으로 향했다. 복층구조로 된 작은 집이지만 1층에 마련된 작업실과 2층의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나름 만족하고 있는 중이다.

운동을 안 했기에 샤워도 건너뛰고 마무리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번 일러스트 작업 중인 동화가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그동안은 일감을 구하기 위해 들어오는 대로 했는데, 이번 일은 우연히 읽어 본 글에 반해 찾아간 출판사에서 나의 일러스트를 보고 흔쾌히 승낙을 해 주셔서 이루어진 기적 같이 성사된 계약이었다. 내가 반한 동화는 한 가족이 세계를 돌며 20여 년 정도를 떠돌이 해외 생활을 하다가 커피를 좋아하는 아빠와 남미의 콜롬비아에 정착하는 신나고 예쁜 글이었다. 그 글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는 내내 내가 마치 그 가족이 된 마냥 세계여행을 하는 상상을 하며 그렸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게 된 지 고작 3년, 15년 동안 열심히 다니던 탄탄한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고 아니 꿈을 찾겠다고 모아둔 돈을 까먹으며 일 년 이상 쉬었다.

쉬면서 주로 여행 다니며 책을 읽었는데, 어느 날 책을 읽다가 갑자기 기억이 났다.

그 옛날 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 중에 직업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나는 동화책 쓰는 사람 아니 동화책 삽화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이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고 해서 바로 접었던 그때 그 순간이 떠올랐다.


모두들 돈 안 되는 헛된 꿈이라고 했다. 그런 꿈은 꾸는 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내 어릴 적 꿈을 실현 중이다.



꿈을 실현 중인 나는 여전히 혼자다. 쓸쓸하고 마음이 늘 허전하고, 겨울엔 더 그렇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말이다.


나도 줄곧 연인이 있었으나 마지막 사랑인지 첫사랑인지 모를 3년 전에 한 그 몹쓸 이별은 차갑게 박힌 유리조각 마냥 내 마음 깊게 박혀 있는 것 같다.

그 누구를 만나도 설레는 그 순간과 무기력해지는 마지막이 떠올라 굳이 이 길을 걸을 필요가 있을까. 시작이 두려운 것인지 끝을 알기에 가지 말아야 할 것인지 모를 이상한 방황에 아예 시작하지도 못한다.

그동안 경험한 숱한 이별이 지긋지긋하기만 하다.


결혼 한 친구들은 아이들 양육하느라 직장도 그만두어 우울하다며, 혼자인 것도 나쁘지 않다며 나만의 시간을 즐기라고 하는데. 나는 이제 내 남아도는 시간을 다 쓸 수가 없다.


나는 과연 누군가를 만나서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게도 우연과 운명의 해프닝으로 인연이 생길까.


***

'지잉~~ 지잉~~' 조용한 나의 일상에 잠깐 참여한 진동벨이 울린다.

"00 출판사입니다. 잘 지내셨죠..?"

"아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일러스트 작업한 것들 보셨어요? 수정전 작업인데 보여 드리고 나서 변경하든 추가하든 하려고요. 동화 작가님 의견을 듣고 싶어요. 처음에 만나 뵙고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데 동화작가님이 무조건 제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셔서.. 이번에는 꼭 만나 뵙고, 마지막 컨펌 진행하고 싶어요"

"네.. 작업하신 일러스트들 잘 받았습니다. 일러스트를 동화 작가님께 넘겨 드렸고요. 그렇지 않아도 작가님이 일러스트레이터님 뵙고 싶다고 하네요. 이번 주에 가능하신가요?"


내가 반한 글을 쓰신 동화 작가님을 만난다니 이렇게 흥분될 수가 없다. 우선은 작가님이 주중 늦은 저녁때만 시간이 된다고 하셔서 내일 저녁 10시에 만나기로 했다. 늦은 저녁이라며 우리 집 근처 카페에서 보기로 하였다. 몇몇 확신이 안 드는 일러스트를 들고 가서 직접 이야기를 나눌 계획으로 작업한 일러스트를 글과 함께 정리해서 컴퓨터에 저장했다.


내가 매일 가는 '플랫 화이트' 카페에서 보게 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문에는 'CLOSE' 사인이 걸려 있었다. 나는 의아해서 불이 훤히 켜진 안을 들여다보니 매일 아침마다 뵙는 사장님이 안에 계셨다. 손짓을 하니 기꺼이 문을 열어주셨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님."


"아... 어떻게.. 저를... 아.. 그럼 사장님이 동화 작가님!"

따뜻한 미소를 짓는 플랫 화이트 카페 사장님의 모습이 멋진 동화 작가님으로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플랫화이트: 에스프레소에 미세한 입자의 스팀 밀크를 혼합하여 만든 커피로, 카푸치노나 카페라테에 비해 맛이 부드럽고 커피 향이 진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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