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내 가방

by 파란선

내 가방


뚜뚝.뚜뚝.

얼음 위를 걷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몇 달씩 오던 눈이 갑자기 3주간 안 내리고, 비가 한번 오더니 사방이 얼음으로 변해 버렸다.

이럴 바에는 덜 미끄럽게 눈이 많이 쌓이는 것이 낫다.


7시다.

잠귀가 유난히 밝은 나는 그가 출근하는 시간이면 눈이 떠진다.

아직 컴컴한 바깥은 쌓인 눈과 얼어버린 길들의 반짝임 때문인지 그의 발걸이 닿는 곳은 밝아 보인다.


불면증이 있어 뒤척이는 시간이 긴 만큼 아침잠이 많아져 버린 나는 늘 그가 출근 한 후에서야 일어난다.


휴직을 한 지 일 년이 지났고 이제는 나의 루틴이 제법 잡혀 나는 곧 등교시켜야 아이들을 위해 후다닥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새벽에 우리 둘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막내 아이가 이불속 안에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침대 정리하면서 본다. 옆방에서 자던 큰 아이는 일찍이 일어났었는지 안방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서둘러 아이들 아침식사를 챙기고, 점심 도시락 세 개를 싼다.

오늘은 크루아상 샌드위치.

미리 만들어 둔 냉동 크루아상 여섯 개를 허겁지겁 180도에 굽는다.

추운 겨울 아침 공기를 달콤한 버터 향이 감싸 안는다.

아이들은 식사를 하면서, 빵 굽는 냄새를 맡는다.


나는 크게 무언가에 중독되지도 조바심을 내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나는 저녁 8시쯤 휴대폰은 끄지도 않고, 주방 한편에 두고 그냥 들어가 잔다거나, 보던 드라마나 만화책 에피소드가 몇 편 그대로 남아있는데 보지 않는다거나, 분명 글쓰기 모임에서 배달되는 매일 글감이 떠 있을 텐데도 쓰고 싶은 생각이 들 때까지 열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등교시키면서 500미터 앞에서 우회전을 하면,

나의 첫 일과를 실행하는 곳.

헬스장.


매일 아침 신발장 근처에 나열되어 있는 책가방들 중 내 가방은 고작 운동 가방 하나.

출근할 일도 등교할 일도 없는 내가 다행히 들고 나갈 가방 하나.

내 가방에 새로 넣는 것은 고작 새 수건 하나.


나는 나름 도시 여자인데, 북유럽에 이사 온 이후로 모셔둔 예쁜 가방 하나를 들 일이 없다.

길다면 긴 워킹맘 15년 차였는데, 노르웨이에 이사 온 이후로 색색깔 별로 있는 셔츠, 재킷, 코트도 입을 일이 없다. 창고에는 휴직 후 모셔둔 구두가 들은 박스들이 가득하다.


옷은 요가복, 신발은 스파이크 달린 운동화, 그리고 가방은 운동 가방.


여행 가방이었던 오래된 레스포색 가방이 나의 운동 가방이 되었다.

한참을 운동하고 나올 때마다 뭐 항상 운동을 잘했던 사람처럼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거들먹거리며 나온다.

운동을 하고 나오니 10시 30분, 한국은 이미 저녁이구나.

이제서야 오늘 글감 확인.

가방.

화들짝 놀래 내 가방을 들여다보았다.

운동 가방으로 바뀐 나의 오래된 여행 가방.

그 안에는 운동용 신발, 물병, 차 키, 머리띠, 작은 가방, 헬스장 카드가 보인다.


나는 매일 이 운동 가방과 함께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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