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장갑

by 파란선



어제 하루종일 내린 눈 때문인지, 이상하게 세상도 우리도 깊은 잠에 들고 말았다. 창가가 큰 노르웨이의 우리 집은 작은 숲 자락에 걸쳐 있어서 마치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들과 눈이 넘치도록 내린 숲속에 잠시 주차한 마냥 집이 눈 속에 파묻혔다. 뒷마당의 문은 눈 때문에 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보낸 눈 치우는 트럭 소리에 깊은 잠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창가 너머로 보니 나무들이 쌓인 눈을 못 이기고 후드득후드득 소리를 내며 눈 폭포수를 보여준다. 동네 이웃도 우리도 분주히 눈을 치웠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장화를 신어도 젖기 때문에 올인원 스키복을 입어야 한다. 장비를 갖추고 아이들도 짝꿍도 눈을 서둘러 치우기 시작한다.


늦잠을 잔 나는 서둘러 거실에 장작불을 떼고, 아이들의 덜 마른 스키복을 장작 난로 위쪽에 걸어놓았다.

차디찬 공기를 휘감고 있는 주방에 들어갔다. 서둘러 오트밀 끓일 물을 올렸다. 난방시설이 없는 거실과 주방이 금방 훈훈해 지길 바라며 물도 끓이고 도시락으로 싸 줄 토스트를 버터에 구웠다.

눈이 아름답게 보이기에는 동이 트지도 않았고, 그저 이 눈을 치워야 차가 차고에서 나가는데.

현실적인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짝꿍을 모두 출근 시키고 돌아오는 길 에서야 밤새 뿌려진 하얀 빛깔과 오늘이라는 세상이 만나 기가 막힌 겨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장작불에 따뜻해진 거실 공기가 내 마음도 되핀 건지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 풍경이 고요하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몇 시지? 아, 아침에 식사 준비를 하면서 엉망으로 두고 간 설거지 거리를 치워야겠다.


마흔이 넘도록 고무장갑이 왜 필요한지를 모르고 살았다. 결혼하기 전에도 그 후에도 외식 때문인가. 식기세척기 때문인가. 고무장갑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맞벌이를 하면서 그런 생각만 했었다.


노르웨이로 이사 오면서 내 평생 처음 주부 습진이라는 것을 경험하였고, 이게 얼마나 고약한지 습진이 생기는 한순간에 고생 안 한 손을 평생 일만 해 온 손으로 둔갑 시키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보기에도 안쓰럽지만, 피부도 고생을 꽤나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고무장갑과 사용 후기가 좋은 핸드크림이다.

유럽의 고무장갑들이 보통은 짧고 타이트한데 이걸 쓰면 일주일 안 가서 오른손만 구멍이 난다. 그래서 쓰다가 포기하고 친구에게 한국 고무장갑을 부탁해서 처음 사용해 보았다. 그렇게 한국 고무장갑이 디자인도 성능도 최고라는 것을 결혼하고 15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 손을 들여다본다. 손이 작고 짧으며, 건조하고 차가운 손이다. 고작 내 손에는 짝꿍이 사준 반지 세 개, 내가 산 반지 하나. 매일 물감이 묻어 있는 손이라 더러워도 무덤덤하게 생각했다. 평생 물감 끼는 손을 크게 관리를 안 하는 터라 손이 예뻐야 하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러다가 한국에 가면 손이 부끄러워진다.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에 가서 고무장갑을 서둘러 끼었다.

곱고 이쁜 손은 아니지만, 습진은 걸리지 말아야지. 아프면 나만 고생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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