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그 갈색 세무 부츠

by 파란선

그 갈색 세무 부츠


눈을 뜨자마자 둘째 아이가 새 실내화가 필요하다기에 1층에 있는 신발장에 내려가 보았다.

큰아이가 실내화로 쓰던 새것 같은 헌 운동화들이 몇 켤레 있었다.

작은 아이가 운동화보다 더 편하게 신고 벗을 실내화가 있을까 싶어 신발장과 가까운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온도가 9도, 춥다.

작은 창문 하나로 숨 쉬는 이 창고에,

머무는 시선마다 회색빛이라 이게 먼지인지 벽인지 모를 이곳에,

제일 먼저 맡은 건 나무 냄새,

나쁘지 않다. 먼지 쌓인 오래된 일기장 느낌?

창고 안에 장작 보관용 창고 문을 열어 놓았구나.


집안 공기와 다른 그곳엔 내 몸 두 배만 한 냉동고, 사람 5명은 거뜬히 들어갈 수 있는 냉장고, 나보다 키가 큰 보일러, 스위치 없는 내 평생 처음 보는 느낌의 두꺼비집, 그리고 그 사이에 각종 신발을 모아둔 또 하나의 신발장이 있다.


나보다 큰 것들은 내버려 두고 신발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휴직 전에 신던 구두들과 첫째 아이가 신던 다른 사이즈의 신발들 사이로 오래된 갈색 세무 부츠 한 켤레가 눈에 띈다. 둘째 아이에게는 운동화를 손에 들러 주고, 나는 또 앉아서 그 부츠를 신어 보았다.

자크가 고장 나서 이제는 열고 신거나, 못 신고 모셔 두거나, 보내주어야 하는 신발이다.


그 갈색 세무 부츠를 산 건 첫아이를 낳기 전 십사 년 전이었나.

나는 운 좋게 좋은 것만 먹고, 입고, 신고 컸던 터라,

경제적 독립 후 내가 번 돈으로 신발 한 켤레 사고 싶었다.

좋은 신발 한 켤레 사려고 폴란드에서 박봉이었던 첫 월급을 기다렸다.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를 모르다가 내 힘으로 사려고 하니 벌기도 쓰기도 어려웠다.

첫 월급으로 산 그 신발을 주구장창 신었다. 그 신발이 왜 그리 좋았나 싶었을 정도로 매일 신었다.

직업상 물감이 자주 튀었는데도 매일 신었다.

청바지에 잘 어울렸고, 정장에도 괜찮았으며, 하물며 원피스를 입고도 신었다.

3년 전에 다녀온 터키 출장 때도 많고 많은 신발 중 그 오래된 신발을 신고 갔다.

현지 사정으로 늦게 도착한 후 발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 새벽 2시에 호텔에 올라가 자려고 침대에 바로 누웠다가 신발 자크가 고장 나서 신발도 못 벗고 다음날까지 그대로 잤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을 정도다.


나는 그 신발이 그렇게나 편하고 참 좋았다.


세월이 지난 후로는 신발을 참 많이도 샀다.

사 모은 신발들이 모두 새 신발인가 할 정도로 새것 같은 헌 신발들이다. 내 발에 안 맞았나.

그러고 보니 아이들을 낳고, 저렴해서 의미 없이 샀던 신발들이다. 어떻게 왜 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내 신발, 첫 월급 주고 산 내 신발, 반가웠다.

텁텁했던 회색빛 공기의 창고안은 어느새 레몬빛 햇살로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이 작은 창문 사이로 빛이 들어오니 창고가 밝아졌다.

아침 해가 떴나.

내일은 신발 자크를 한번 고쳐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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