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 이문세, 봄바람 -
언제나 나에게 그대는 봄이야
척 봐도 시작하는 저들 어쩐지 웃음 나
그때 우린 저들 같았을까 떠올려 보지만
그래 마냥 좋았어 다시 내겐 없을 만큼
허나 지나버린 얘기인데 웃을 뿐이야
봄바람처럼 살랑 날 꽃잎처럼 흔들던 사람
꿈처럼 지난날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봄바람처럼 살랑 내 가슴을 또 흔드는 사람
언제나 나에게 그대는 봄이야
봄 같은 그녀, 에리카
얼마 전 자주 가는 중고숍에서 그동안 눈빠지게 찾았던 노르웨이 컵을 하나 발견했다. 겨우 하얀색의 단순한 컵이지만 그 컵 라인이 마음에 들었다. 겨우 하나 찾았지만, 마음에 드는 컵이니 여기에 마시는 커피는 더 향긋하다. 추억으로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오늘은 두 잔 필수.
에리카를 처음 만난 날은 내가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직 후 복직한 날이었다. 남편이 복직할 때는 리더십 팀을 더불어 무려 열 댓 명의 물갈이를 하면서 많은 이들이 새로 함께 일을 시작하였는데, 다음 해 내가 복직한 날은 달랑 그녀, 에리카와 나였다. 굳이 한국식으로 따지면 입사 동기 같은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사택 아파트 옆 동 같은 라인에 살았다. 영국인 남편과 로마니아에서 이직한 그녀는 미국인이고, 나와는 동갑 그리고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엄청 꼬여 있는 갈색 곱슬 머리와 보조개 같은 귀여운 흉터 자국 파란 눈, 마치 빨간 머리 앤의 주인공 마냥 활짝 핀 이름마저도 어울리는 에리카였다. 그녀는 너무 쾌활해서 첫 만남인데도 불고하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나는 듣고만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고, 학교시설과 근무상황을 알려 줄 담당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너무 말이 많은 사람 혹은 모든 일에 나서는 사람과 친해지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다.
사실은 쉽게 깊은 인연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지켜보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관계를 이어가는데, 그녀는 달랐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너무 좋다고 했다. 친정엄마가 친정 아빠를 '오빠'라고 부른다고, 부모님이 한국 드라마에 푹 빠지셨다고, 한국의 음식이 좋다고, 한국인 중 네가 좋다고 자주 말을 하고는 했다.
그녀는 말을 잘하고 쾌활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무엇이든 돕는 것을 좋아한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늘 배우려 하며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이상적인 성격과 마음가짐을 가졌다. 에리카는 런닝과 사이클을 좋아했는데, 다음 해 그녀는 하프 마라톤에도 참여했었다. 체력과 끈기까지 있었다. 한 마디로 일도 놀기도 잘하는 과였다.
그런 그녀는 금방 리더십 팀에 합류했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신뢰했고,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그녀를 찾아 상의를 하고는 했다. 컴퓨터 과학 쪽을 전공했지만, 문학 쪽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녀는 다방면에 빛이 났다.
복직 후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을 때마다 나와 함께 마셔주었고, 먹어 주면서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에리카를 처음 만난 그날 부터 3년간 매일 만났고, 매일 웃었고, 매일 즐거웠다. 봄처럼 설레게 하는 그녀고 봄처럼 늘 밝아서 그녀의 고민의 무게를 쉽게 알지 못했었다. 그렇게 3년이 마저 되기 전 그 해 에리카는 그토록 원하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자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안정을 취하며 병원을 다니겠다 하였다. 회사 쪽에서는 매우 실망했고 안타까워했지만, 십여 년간의 방랑자 생활을 마치고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갔다. 4년이 지난 지금, 에리카와 남편, 그리고 외아들 찰리는 미리 구매해 둔 수영장 딸린 집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가끔 휴대폰 왓츠앱에 알람이 들어와 있다.
'하이! 마이 프랜, 내가 오늘 뭘 읽은 줄 알아. 제주의 해녀? 읽어 보았어?
한국에 관한 책은 너를 생각나게 해.
너무 흥미로운 이야기였어. 오늘 하루 너에게 행복한 하루였기를.
보고 싶어.'
'하이! 마이 프랜,
이것 봐, 오늘 내가 뭘 만들었게! 비빔밥!!! 네가 해 주었던 음식 먹고 싶다.'
첫 번째 커피를 다 마셨다. 또 봄 같은 그녀가 생각났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산 날, 에리카는 늘 내게 말했다.
"알만 해. 네가 또 얼마나 기분 좋았을지를."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