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옥스퍼드에서 시험을 본다는 것

왜 이렇게 하냐고? 원래 그래왔으니까.

by 수지

영국에서 사건,사고만 겪은 건 아니다. 놀랍게도(?) 학교에서 공부도 했다.

그리고 평가도 받았다. 오늘은 시험에 대한 이야기다.


이론물리학 석사과정 오리엔테이션 날, 교수님이 평가 기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석사과정도 시험 볼 때 꼭 subfusc를 입어야 하나요?"


subfusc...?

낯선 단어에 어리둥절해졌다.

옆에 있던 '버디'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줬다.

하얀 셔츠, 까만 스커트, 치렁거리는 가운, 딱 달라붙은 리본, 단정한 구두, 학사모...

누가 봐도 시험 치기에 편한 복장은 아니었다.

신입생 몰래카메라라도 찍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교수님 표정이 더 진지했다.

"너네 그런 거 하고 싶어서 여기 입학한 거 아니야?"


3달 뒤, 나는 정말로 이렇게 입고 시험장으로 가고 있었다.

무조건 검은색만 가능하대서 급히 구매한 검은 롱패딩을 입고.

솔직히 시험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아직도 몰카를 당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호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관광객들이 다가왔다.

"혹시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 나는 수험생이 아니라, 관광 명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현타가 와서 급히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험장도 참 쓸데없이 화려했다.

100년 넘게 학교의 공식 시험장 역할을 해온 건물이었다.

내부는 더 했다.

대리석, 긴 복도, 샹들리에, 연회장 같은 대형 홀,

벽에 걸려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초상화들까지.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 무도회라도 열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실제로 학기 중에는 파티장으로 쓰이기도 하는 곳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한 일은, 낙서처럼 보이는 수식을 끄적이는 것이었다.

웅장한 배경 덕분에, 안 그래도 허접한 내 답지는 더 허접해 보였다.



"복장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학생은 시험을 볼 수 없습니다"

굵은 글씨의 경고문.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런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는 친구도 있었다.

시험장에서 걸어서 한 시간이 걸리는 곳에 사는 친구였다.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운동화를 신어야 했지만,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구두를 꺼내 갈아 신었다.

"이래야 코디가 살지!"

내 발을 내려다봤다.

흰색 배경에 검은 줄 몇 개 있는, '검은색을 호소하는' 스니커즈.

'설마 신발 때문에 퇴장당하진 않겠지...?'

그리고 아무도 내 신발을 검사하지 않았다.


다른 해프닝도 있었다.

다 같이 로비에서 막판 암기를 하고 있는데,

"헐, 나 학사모 안 가져왔어!"

결국 친구는 전력 질주해 기숙사에 다녀왔다.

... 그러나 그날 시험관 중 그 누구도 모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친구는 괜히 뛰었다.


모호한 부분은 또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카네이션 전통이었다.

첫 시험에는 하얀색, 중간에는 분홍색, 마지막 시험에는 빨간색 카네이션을 가슴에 다는 게 전통이라는데,

문제는 '마지막 시험'의 기준이 뭐냐는 거였다.

'학기의 마지막'이냐, '학년의 마지막'이냐.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과 단톡방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각자의 해석대로 시험장에 갔다.

그 날, 시험장에는 두 부류의 학생이 있었다.

'학기가 기준이다!'라던 학생들은 빨간 카네이션을,

'학년이 기준이다!'라던 학생들은 분홍 카네이션을 달고 왔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시험이 끝났다.

누가 맞았던 걸까?

아무도 정답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 순간, 교수님이 오티 때 하신 말이 떠올랐다.

"이 학교에서는 '왜 그렇게 하냐?'라고 물어보면 안 된다.

'언제부터 그랬냐?'라고 물어봐야 한다."

스니커즈도, 꽃도, 모자도.

그냥 옛날부터 쭉 그랬던거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