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도난당하다
복학 후 첫 방학. 영국에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춥고 어두운 영국 겨울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학기 중에 먹던 약이 유럽에서 생산 중단되어 약국마다 재고가 없었다. 결국 한국에서 연말을 보내고, 약도 다시 처방받기로 했다.
2022년 12월 3일, 토요일 오후.
히드로 공항행 버스를 타러 기숙사 문을 나섰다. 크리스마스 시즌 첫 주말,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때 갑자기 노숙자 한 명이 길을 막아섰다.
"돈 좀 줄래?"
평소처럼 무시하고 지나쳤는데, 몇 걸음 가지 않아 가방이 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지퍼가 열려있었고, 여권이 든 파우치도 사라졌다.
노숙자는 미끼였고, 일행이 뒤에서 가방을 턴 것 같았다.
출국까지 4시간. 여권이 없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소매치기들은 여권 파우치를 지갑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정작 지갑에는 현금 30파운드와 쿠폰 몇 장뿐이었다.
"차라리 진짜 지갑을 훔쳐갈 것이지...."
기숙사로 돌아와 대사관 긴급 콜센터에 전화했다.
월요일에 런던에 있는 대사관에서 긴급 임시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긴급"이라는 조건이 문제였다. 말 그대로 "긴급"한 경우에만 발급되기 때문에, 유학생인 내가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만약 임시 여권이 거절된다면?
대사관을 통해 한국에서 새 여권을 정식 발급받아야 했다.
문제는 영국-한국 간 배송과 크리스마스 연휴.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여권을 받을 즈음엔 방학이 끝나 있을 거였다.
그다음으로는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하필 그날은 주말이라 연결이 되지 않았다. 비행기 표를 날릴 위기에 처했다.
결국 다음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짐도 도로 챙겨갔지만, 항공사 직원은 단호했다.
"여권 없이 출국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행히 표는 같은 항공사의 다음 항공편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이제 희망은 단 하나.
월요일에 긴급 여권을 발급받고, 그날 저녁 비행기를 타는 것뿐이었다.
12월 4일 일요일.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준비했다.
긴급 여권에 붙일 사진, 새 비행기 티켓, 여권 사본, BRP 사본.
그리고, '왜 내가 꼭 한국에 나가야 하는지' 마치 논문 참고문헌 정리하듯, 번호를 매겨가며 정리한 사유서. 진단서도 첨부했다.
12월 5일 월요일.
이른 아침, 캐리어를 끌고 대사관에 갔다.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됐다.
"긴급 여권 발급해 드릴게요" 직원이 말했다.
순간, 온몸의 힘이 빠졌다.
긴급 여권을 받아 나온 시간은 아침 10시 반. 비행기는 저녁이었다.
런던에 사는 친구가 쉬는 날이라며 나를 만나러 왔다.
우리는 브런치를 먹고, 크리스마스로 꾸며진 거리를 구경했다.
계획에 없던 런던 관광. 어쩌다 보니 꽤 괜찮은 하루가 되었다.
물론, 이번엔 가방을 꼭 안고 다녔다.
그날 저녁까지 긴급 여권은 무사했고,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임시 여권이 흐릿하게 출력된 탓에 심사가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감지덕지였다.
이틀 전 공항버스에서 멘붕에 빠졌던 사람은 이제 인천공항에 서 있었다.
여권은 털렸지만, 방학만큼은 지켜냈다.
한국의 행정력과, 방학이 간절한 대학원생의 집념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