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안(至安)

by 그믐

나는 죽었다.
언제부턴가 시작된 우울이라는 파도가 발목 주변에서 일렁이기 시작해 어느샌가 내 키보다 높아져 나를 집어삼켰다. 그렇게 죽음의 길로 발을 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죽지 않았다. 아니, 죽지 못했다. 사는 것이 두려워 도망치는 주제에 죽는 것도 무서워 또다시 도망쳤다. 그러나 나는 결국 죽었고, 필사적으로 도망친 것에 비해 죽음을 맞은 이유가 너무나 간단하고 허무해 우스울 정도였다. 학교에서 미술실을 청소하다 건드린 석고상 진열장이 내 머리 위로 쏟아진 것이다.

쿵-

진열장 유리문이 큰 소리와 함께 깨져 산산조각이 나고, 안에 있는 석고상들은 그대로 나를 덮쳤다. 찢어진 두피 사이로 배어 나오는 따뜻한 액체가 나를 가만히 감쌌고 귀에서 나는 삐… 하는 이명은 주변 소리를 차단시켜 마치 햇살 가득 푸르른 들판에 누워있는 듯했다. 심장이 귀에 달린 듯 쿵쾅쿵쾅 소리가 내 몸을 뒤흔들었고 점점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달려오는 선생님이 보였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탓에 그토록 바라던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
그렇게 영원한 잠에 빠질 줄 알았다. 그것이 나의 염원이었고 이루지 못한 소원이었다. 하지만 나의 육체는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혼과 정신은 멀쩡히 살아있었다. 한 손에 잡으면 흐스러질 것 같은 몸, 정해진 형태 없이 이 공간을 맴돌고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전, 문득 하나의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의 빈자리는 누가 채울까, 나의 죽음을 누가 슬퍼할까. 머뭇거리기도 잠시, 나는 곧 답을 찾기 위해 내 장례가 치러지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어디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내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빈소는 놀라울 정도로 텅텅 비어있었다. 고아원 원장님이 상주를 서주고 계셨고, 예전에 오며 가며 가볍게 인사만 나누었던 친구 몇 명, 학교 선생님들과 원장님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아저씨들 몇 명이 다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눈물을 흘리거나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형식상 나의 죽음을 애도할 뿐. 그제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부모님이 있었더라면,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렇게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옛 기억에 빠지려던 찰나, 어디선가 내 이름이 들려왔다. 아까 내 빈소에 있었던 그 친구들이었다. 그래도 나를 추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설렘을 안고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무책임한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지안 결국 죽었네."

"왜 얘 장례식을 걔네가 안 오고 우리가 와야 해?"

"귀한 몸들이시잖냐."

"야, 근데 얘 죽으면 걔네 샌드백 누가 함?"

"그냥 최대한 눈에 안 띄는 수밖에 없지. 하여튼 얘도 대단해. 그렇게 맞고도 학교는 꼬박 나온 게, 나였으면 그냥 자퇴했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그들은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깐, 내가 왜 죽고 싶어 했더라. 머릿속이 하얗다. 누군가가 초기화 버튼을 누른 것처럼 살아 숨 쉴 때의 기억이 드문 드문 끊겨 있다. 자살 기도를 수차례 했다는 것은 기억나지만 왜 자살 기도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고, 학교에서의 기억은 아예 없다. 분명히 학교를 다녔지만 내 머릿속에 학교 생활을 하는 내가 그려지지 않는다.

집에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내가 머무르던 곳으로 곧장 왔다. 무언가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희망을 안고 도착한 나의 보금자리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여기저기 곳곳에 절망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애써 그것들을 못 본 체하고 벽장을 열었다. 열리지 않았다. 내가, 열지 못했다. 나의 몸은 너무도 희미해 곧 사라져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것이 내가 그것들을 만질 수 없는 이유였다.

절망적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또다시 나를 덮쳐왔다. 살아있었다면 또다시 나쁜 생각을 했을 텐데, 이미 죽었기에 지금 이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또다시 이 방에 갇혀가는 그때, 나의 방에 낯선 이가 들어왔다. 아니, 초면이 아니다. 분명 어디서 만난 적 있는 얼굴이다.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내 방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아, 생각났다.
우리 보육원에 대해 기사를 쓴 기자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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