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形象) 이전과 형상 속에서 드러나는 미(美).
불교에서 아름다움은 특정 형상(形象)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 아름다움은 '대상이 아름답다'는 판단 이전의 자리에 이름 없이 머문다.
보는 마음이 고요해져 분별이 쉬면 미·추로 갈라놓던 이름이 사라지고 보이는 모든 것이 미로 드러난다.
형상은 연기된 것이며, 공(空)의 장에서 조건 따라 잠시 드러났다 사라지는 파동이기에 그 자체에 실체적 '미'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불교의 미는 집착 없는 인식, 무심한 투명성, 그리고 고요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여여(如如)의 현전이다.
즉,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경계가 해체될 때, 미는 대상 에 대한 판단의 결론이나 감정, 어떤 느낌이라기보다 존재 전체의 감응으로 다가온다.
상기는 차 선생님의 지인의 쓴 글 중에서..
차 선생님들 중 한분과 간만에 이야기를 나누다가나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선생냄이 쓴 굴을 소개해 주셨다.
바라보는 상태에서의 미학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 바라봄이다.
바라보는 것은 형태(形態)에서 출발한다.
형태(形態)는 사전적 의미로 1. 사물의 생김새나 모양.2. 어떠한 구조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체가 일정하게 갖추고 있는 모양. 3. 부분이 모여서 된 전체가 아니라, 완전한 구조와 전체성을 지닌 통합된 전체로서의 형상(形象)과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형(形)의 기본은 태(態)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형이 기본이라 생각하지만 그보다의 근본(根本)은 태(態)에 기인한다.
태(態)는 態자는 ‘모습’이나 ‘형태’, ‘상태’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 態자는 能(능할 능)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이것을 풀이한다면 형상은 형태보다는 의미가 작다 할 수 있는데 형을 지니기 위한 마음이 바로서야 그 형을 세울 수 있다. 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태의 마음가짐 이 기본이 형을 만드는 것이며 바라보는 것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올바른 것을 보게 해주고 사물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크나한 것을 볼 수 있는 시각은 형을 바라보는 눈(目)에서 나온다. 출발 이 시선의 시작이 눈(目)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바라보는 것 즉 바라봄의 완성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무한이다. 그러나 이 바라봄을 올바르고 슬기롭게 하는 형태(形態)와 형상(形象)을 바라보는 안목(眼目)을 기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나 스스로가 타인 상대방을 바라보는 상태을 표현해 주는 글 중에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본다. 라는 의미로 여실(如實)은 ‘있는 그대로’, 지견(知見)은 ‘알고 본다’는 뜻이다. 나는 특정한 종교에 대한 성향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응 비롯한 동양의 사상은 불교에서 기인한 것이 많다. 그리고 한자는 오래전부터 접해온 일상이기에 누구보다도 편하다. 이 여실지견 (如實知見) 의미로만 본다면 깨달음 혹은 견성(見性)과 다르지 않고 실천행으로 본다면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과 궤를 같이 한다.
정견(正見)은 바르게 보는 것이다.
실상을 바르게 봐야(正見) 바른 사유(正思惟)가 생기고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가능하다.
"팔정도(八正道) 팔정도는 8지성도(八支聖道)라고도 하며 '8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도(道)'라는 의미이다.
이 도가 파리어로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은 8개가 하나의 성스러운 도의 각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8개 가운데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7개가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 즉 상섭(相攝)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팔정도(八正道)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실지견(如實知見)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르게 본다는 것은 진실 되게 행동한다는 것이고 거짓 없는 삶을 산다는 의미다. 이것은 곧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을 의미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는 일. 즉 바라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자세와 태도의 미학, 이것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바로 다인(茶人)의 자세이며, 이것의 확장이 바로 다도(茶道)다.
난 이것을 이 격(格)의 상승. 즉,나 자신 스스로의 수련(修鍊)을 차, 즉 말차(抹茶)에서 배웠다.
우라센케(裏千家)와 오못데센케(表千家)의 수업과 공부와 학습 이는 나와 타의 경계를 그 연결을 시작하게 해 준 스승이나 다름없다. 또한 이 공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이는 곧 이치고이치에( 一期一会)의 행으로 표현된다.
차 선생님과의 잠시의 대화에서 나는 이 태(態)에 대한 근본의 자세.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보고 행한다.
이 의미를 생각해 보는 현재의 오늘 오늘의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