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수목원의 봄이 시작되었다.
▣3월 봄눈이다. 봄눈답지 않게 폭설이 내렸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꽃소식에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는데 난데없는 눈소식이라니! 꽃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따로 없겠다. 봄날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려나? 아무튼 눈폭탄이 쏟아진 3월의 어느 아침, 서둘러 대구수목원으로 향했다. 설중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힘든 걸음이었지만 그만큼 설렘도 함께 했다. 봄눈이 내렸고, 나는 난생처음 설중매를 만났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풍경이지만 한때는 너무 사랑했던 풍경이다. 그래서 여기를 지날 때마다 가끔은 울컥할 때가 있다. 십여 년 전 대구수목원에서 현풍 테크노폴리스 연결도로 개통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이렇게 사진으로만, 마음에만, 남은 풍경이 되었다. 좋아서 찍었던 사진이 기록으로 남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사라진다. 물론 편의에 의해 새로운 것들도 많이 생기지만 변화에 느린 사람이어서인지 바뀐 것들에 쉽게 정을 주기가 어렵고 예전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앓곤 한다.
눈이 귀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대구는. 그 대구에 때아닌 봄눈이 폭설로 내렸으니 초비상이다. 도로사정도 전쟁터를 방불케 했고 곳곳에 제설작업으로 분주했다.
집을 나설 때 놀이터에, 학교 운동장에, 새벽같이 뛰쳐나온 아이들과 아이들의 성화에 함께 나온 엄마, 아빠들이 많았었는데 대구수목원에도 가족들과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나와 함박눈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눈이 와서 힘들고 불편한 일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눈은 낭만이고, 환상이다.
눈사람. 눈 오는 날엔 무조건 눈사람이지! 진리다. 웃는 눈사람. 둘이어서 춥지 않고 외롭지 않고 포근하고 정겹다.
눈 속에 피어 있는 복수초를 만났다. 복수꽃의 순우리말이 '얼음새꽃'이라는데 그 이름에 납득이 되는 순간이다. 또 '눈 속의 봄'이라는 예쁜 별칭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꽃이 황금색 잔처럼 생겼다고 '측금잔화'라고도 부른다는데 노란 꽃잎이 눈 속에서 더 환하다. 재밌는 사실은 동양과 서양의 꽃말이 다르다. 동양에서는 '영원한 행복'인데 반해 서양에서는 '슬픈 추억'이라고 한다.
두 그루의 리기다소나무가 있어 멋진 풍경을 만드는 분수광장.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그루 리기다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 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정호승.
보일 듯 말 듯 투명하게 얼어붙은 연못 가운데 자리한 작은 섬에는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설원이 펼쳐져 있다. 징검돌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였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인 설중매다. 눈 속에 고아하게 피어난 납매. 납매는 섣달에 피는 매화라는 뜻이다. 눈 속에 노란 꽃을 피운다고 '황설리화'라고도 한다. 매화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지만 납매는 매화과가 아닌 납매과에 속하는 매화와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투명하게 하늘거리는 노란 꽃잎이 눈 속에서 더욱 반짝인다. 설중매로 핀 납매도 아름답지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담은 납매 사진도 무척이나 청량한 느낌이다. 납매의 꽃말은 '자애'이다.
나뭇가지마다 눈이 쌓였다. 물감을 묻혀 롤러로 밀면 잎맥이 그대로 찍히는 어린아이들의 퍼포먼스 미술 잎맥 찍기 놀이 같다.
언제나 늠름한 플라타너스 나무는 가지마다 눈이 덮이니 나무가 가진 무게가 한층 더 깊어졌다.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눈 위에 쓰는 겨울 시/류시화)
이 풍경은사진을 찍고 보니 대구수목원이 아니라 강원도 어디쯤의 깊고 울창한 숲 같다. 눈이 내리니 세상도 기묘한 풍경이 된다. 눈이 없다면 나무들이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풍경일 뿐일 텐데.. 나무들마다 겹겹이 눈 덮인 풍경은 순간적으로 셔터를 눌러 오래 간직하고 싶은 그림이다.
3월 봄눈으로 동화 같았던 대구수목원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니 하늘은 조금씩 개고 있었고, 주차장은 곳곳에 제설 작업이 완료되어 있었다. 선물 같은 하루였다. 예고 없는 뜻밖의 선물에 느끼는 감정을 우리는 감동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감동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삭막하고 어지러운 현실에서 작고 따뜻한 온기로 기억되기를!
-대구수목원은 나의 작은 놀이터.
-어느 해 3월 대구수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