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가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하지만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는 풍경이 하나 있다. 늘 안방에 계시던 할머니의 모습이다.
큰 기와집이었다. 하늘색으로 칠해진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뛰어놀기에는 너무 넓어서 별이는 그 마당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끼곤 했다.
마당 한쪽에는 사랑채가 있었고, 결혼하지 않은 삼촌 세 분이 그곳에서 지내며 집안일을 도왔다. 행랑채에는 누런 황소가 외양간에 있었고, 엄마에게만 허락된 보물 같은 물건들을 넣어 둔 다용도실 같은 창고와 벼를 가득 저장해 둔 곡간이 나란히 붙어 있었고 화장실이 두 개 있었다. 또 다른 행랑에는 돼지우리와 두 칸의 창고가 있었다.
집은 'ㄷ'자형 기와집으로 마당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었다.
집 둘레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고, 뒤뜰에는 그보다 더 넓은 꽃밭이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들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계절을 건너갔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서로 다른 꽃들이 차례로 피어나 마당을 채웠다.
장독대는 유난히 컸다. 겨울이면 김치를 묻어 두는 김장독 땅이 따로 있었고 비닐하우스처럼 덮어 두었다. 뒤뜰에는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는 우물이 있었다. 여름에 수박을 우물에 담가 두면 아주 시원했다. 시간이 흐르며 펌프가 생겼고, 나중에는 수도까지 들어왔다.
앞마당을 지나 한 단 더 올라가면 부엌이 있었다. 뜰에서 마루 아래로 반지하 저장 창고가 있어 겨울에는 무나 파를 저장해 두고 꺼내 오곤 했다. 그 뜰을 올라 서면 반들반들 닦인 나무 마루를 건너면 안방과 가운데 방, 그리고 맨 윗방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안방 뒷문을 열면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는 또 하나의 마루가 있었다. 그 곁에는 길고 긴 빨랫줄이 걸려 있었고, 가족들의 옷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별이는 보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늘 안방에 계셨다. 머리는 하얗지 않고 검은빛이 많았고, 뒤로 비녀를 꽂았다가 비녀가 불편하시다고 하나로 묶으셨다.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이었다. 앉아 계시거나 조용히 누워 계셨다.
별이가 태어났을 때는 할머니가 별이를 업어 주고 안아 주셨다지만, 별이의 기억 속 할머니는 늘 안방에 앉아 계시거나 누워 계신 모습이었다. 가끔 언니와 오빠의 손을 잡고 벽을 짚으며 천천히 운동을 하시기도 했다. 오빠가 조금 더 컸을 때는 할머니께서 방에만 계시니 답답하실 거라고 하면서 리어카에 담요를 깔고 할머니를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곤 했었다. 어린 오빠였지만 참 멋져 보였다. 아버지께서 직장에 안 나가시는 날이면 할머니 모시고 이렇게 동네 위, 아래를 돌아 오시곤 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오빠가 아버지 따라 시키지 않아도 종종 그렇게 했다. 물론 언니랑 나는 리어카 뒤에서 밀고 밀고 달리고 했다. 그런 날은 우리 남매들은 서로 더 도와가며 즐겁게 할머니를 안전하게 태우고 모시고 다녀서 더욱 알차고 뿌듯했던 하루라 생각하곤 했었다.
별이가 두 살이 되던 해, 할머니는 갑자기 쓰러지셨다. 뇌졸중 증상으로 쓰러지셔서 풍이 왔고, 오른쪽을 잘 사용하지 못하게 되셨다. 밥도 왼손으로 드셨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열두 해를 안방에서 보내셨다. 그때부터 집안의 모든 생활은 할머니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먹는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 제일 맛있는 것은 늘 할머니 몫이었다. 할머니가 드시고 남은 것이 우리들의 차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아침마다 가장 먼저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안부를 여쭈었다. 식사도 늘 할머니를 중심으로 차려졌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한 상에서 겸상을 하셨고, 아이들은 따로 한 상을 받았다. 일하시는 삼촌들과 모두 모여 함께 밥을 먹었다.
별이는 그 풍경이 너무 당연해서 가족이란 원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른 새벽, 일정한 리듬으로 울리던 칼질 소리는 하루를 여는 배경음악이었다.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냄새와 숯불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던 생선의 온기가 집 안 가득 번졌다. 밥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그 순간들이 얼마나 따뜻한 사랑이었는지, 그때의 별이는 미처 알지 못했다. 너무 흔해서 귀한 줄 몰랐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별이의 어린 시절은 넓은 마당과 안방의 할머니, 그리고 많은 가족들의 숨결 속에서 조용히 흘러갔다.
그때의 별이는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늘 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평범한 하루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평범했던 날들이 사실은 가장 따뜻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안방에 누워 계시던 할머니의 모습, 새벽마다 들리던 부엌의 도마 소리,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밥상과 한자리에 모여 앉던 가족들. 그 모든 장면들이 이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빛나는 기억이 되었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런 집 하나씩이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 돌아가 쉬어 갈 수 있는 기억의 집 말이다.
별이에게 그 집은 여전히 하늘색 대문을 열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안방에는 단정한 모습의 할머니가 계시며, 부엌에서는 따뜻한 밥 냄새가 피어오르는 곳이다.
시간은 흘러 그 풍경은 사라졌지만, 그 집에서 받은 사랑만은 오래도록 별이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