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가만가만 눈송이들을 짚어 가며
헤아려 보는 일은 즐겁지만
지난 몇 년간 이곳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물이 느리게 닿고 싶을 때 눈이 된대,
우리도 그러자, 서두르지 말자. 천천히 늙고 싶은 꿈
무성한 물의 군락에서
낙하하는 집단투신의
한때,
눈은 물이 꾸는 레퀴엠
영하에 가까울수록
제 몸을 먼저 움켜쥐어야지
스스로를 쥐어 본 자만이 느끼는 안도감, 불안감
이제 제 결정은 아름다워도 될까요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 인력을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내,
종일 줄지 않는 좌판을 바라보는 늙은 여자의 웅크림,
검고 큰 가방을 멘 채 자정 넘어 집을 향하는 중학생,
내리는 눈을 피해 승용차 아래로 피신한 고양이의 눈동자,
모든 웅크린 것들은 활짝 펼쳐지지 못한 결정.
결국에는 녹아내려 고이게 되겠지만
구름이 일제히 각자의 눈물을 장전한다.
마른 풀들로 뒤덮인 정원을 향해, 골목길을 향해
무엇도 될 수 없어 흘러내리고 싶은 나에게
떨어지는 눈은 망명의 방법을 알려 준다.
그러나 어디에도 가야 할 곳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