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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쉬코프스키, 그리고 열한 살 청중을 생각함

<고전과 낭만 사이>,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라흐마니로프

by 아르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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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초리가 날렵한 청년으로 성장했을 게 틀림없다.

눈웃음 단계 직전에서 멈출 줄 아는 깜박거림에서

일상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리듬을 건져내고,

그 안에 저마다의 멜로디를 이어갈지도.


열한 살이었다, 십수 년 전의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얼마간 부산스럽게.

공연장 2층 앞줄 객석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누가 봐도 일행이었다. 그런 오해를 받기 싫었을까.

부러 아이 쪽으로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연주 감상 방해꾼이 하필 내 옆자리인가,

닥치지도 않은 일을 기정사실로 만들기도.


아이를 쳐다보지, 아니 관람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

대홍수로 수문을 모두 개방한 댐처럼 객석에 쏟아지고

수량은 고스란히 아이의 눈에 저장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의 눈은 수평선이 아득해지는 저수지가 되어갔다.

수심이 깊어질수록 옆 사람 정도만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요란하지 않은 손짓으로 허공에 음표를 그려나갔다.


무대와 옆을 적당한 간격을 두면서 관람하다가

결국 옆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무르는 형국이 되었으니

그 아이는 연주 방해꾼이 맞다. 동시에 최고의 청중이었다.

연주자의 이름은 가물가물해졌으나 음악을 감응하는

소년의 눈빛과 손짓이 여태 생생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아이가 내게 가르쳐 준,

내면의 속삭임에 따르는 움직임은 수문을 채 닫지 않았다.


인터미션, 가방을 뒤져 사탕 몇 개를 조공으로 바쳤다.

또래 평균치 신체 성장 속도를 보이던 어린 황제는

상쾌한 웃음과 더불어 손을 맞잡는 영광으로 답례했다.


지난 1월 2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고전과 낭만 사이’를 관람했다.

서울시향 신년음악회에 이은 2025년 두 번째 클래식 공연이다.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지휘 최영선)과 두 피아니스트(일리야 라쉬코프스키, 예수아)

구성된 프로그램은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라흐마니로프다.

2악장 유려한 선율과 3악장 박진감이 만나는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도입부부터 압도적으로 사로잡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모든 찬사를 구차하게 만드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앞의 두 곡을 러시아 피아니스트 라쉬코프스키가 연주했다.


2022년 12월 17일, 아트센터인천에서 같은 연주자로

라흐마니노프 3개의 피아노협주곡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을 고스란히 복원시켰다. 피아노 연주의 바통을 받고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이어나갈 때 피아니스트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십수 년 전의 어린 청중을 떠올렸다.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때까지

오케스트라 연주에 빠져들겠다는 듯 오선지를 오르내리는 고갯짓.

입술과 어깨로 긋는 곡선과 작은 운신이지만 크게 다가오는 손짓.

엉덩이의 들썩거림조차 나는 음악 감상 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흔을 넘긴 피아니스트의 모습에서 소년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 아이가 더 나이 들면 꼭 이렇게 음악에 젖을 것 같은 몸짓!

그 춤을 다시 눈에 담으려면

오는 4월 26일, 부천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낭만주의 거장 <차이코프스키 & 라흐마니노프>를 예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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