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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는 매회 죽어야 한다

연극 <킬링 시저>

by 아르뛰르




July. 7월은 시저(Julius Caesar)의 달이다. 기원전 100년 7월에 탄생한.


7월,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시저가 등장하는 연극을 관람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했다. 21세기 전의 인물을 어떻게 복원해 낼까. 먼저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고온다습한 공기층을 뚫고 걸으면서 묻혀온 일상의 끈적함을 털어낸 공연이었다.


객석에 앉아 정면을 응시했다. 무대 중심에서 대형 컴퍼스를 돌려 그은 듯 균일한 반원형 상단은 중앙보다 상당히 높았다. 무대 바닥과 상단을 가파른 곡선으로 이어 경사를 준 의도를 머잖아 짐작할 수 있었다. 장면과 상황에 따라 분리되다가 자연스레 이어지는 시공간으로 보이려는 장치였다.


<킬링 시저>. 제목에서 말하고 있듯이 시저를 죽여야 한다. 로마공화정을 뒤흔드는, 조만간 황제에 오를 게 분명한 인물을, 더 늦게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카시우스(양지원 분)는 브루터스(유승호 분)를 설득한다. 시저(김준원 분)를 밀치고 로마의 이상을 가슴에 품은 브루터스, 칼날을 벼리고 암살에 가담한다.


극의 초반부터 상승곡선을 긋던 긴장도는 좀처럼 낮춰지지 않았다. 배우의 발성과 연기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집으로》의 상우 이미지를 여태 떨치지 못한 관객으로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년이 물리적 시간을 훌쩍 넘어 순식간에 서른을 넘긴 배우로 변신한 느낌이랄까. 시저의 몸에 칼을 찌르고 나서 번뇌를 채색하는 배우와 마주하는 내내 그의 눈빛을 읽었다. 그 무렵부터 확신이 생겼다. 브루투스 캐릭터에 꼭 들어맞는 체구를 지닌 배우가 바로 그라는 것을.


시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으므로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로마 시민을 설득하듯이 관객을 설득하는 브루투스와 추모 연설 속에 함정을 만들어 브루투스를 파멸케 하는 안토니우스(양지원 분)의 이중주. 죽어서도 변치 않는 절대권력의 상징에 기대어 새로운 권력을 잡으려는 자의 욕망과 그의 계략에 휘말리는 자의 절규. 여기에 다양한 역할로 극의 배경을 만들어가며 서사의 깊은 맛을 우려내는 코러스의 호흡이 더해졌다. 인터미션 없는 러닝타임 90분은 반토막이 될 수밖에.


역동성과 상반되는 때때로 느려지는 배우들의 움직임. 극적인 상황에 사진을 찍는 듯한 멈춤이 한 컷의 이미지가 되어 그대로 머릿속에서 인화하였다. 순서대로 저장된 이미지들은 얼마간 무대를 반추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게 뻔하다.


카이사르. 시대를 대변할 만한 베스트셀러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덕분일까. 라틴어 표기 또한 낯설지 않은 인물을 문학에서 되살렸고, 이를 무대에 옮겼다. 그리고 현대적인 시각으로 다시 들여다봤다. 그러므로 시저는 매회 죽어야 한다. 매번 죽어서 관객의 팔뚝을 서늘해지도록 해야 한다.


연극 킬링 시저 캐스팅.jpg


연극 킬링 시저 포스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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