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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김선민의 스케이트 날

<김선민 피아노 리사이틀>

by 아르뛰르




‘의식의 얼음 호수를 지치는 스케이트 날’이라고 썼다가 지운다. 더 명확한 표현을 찾을 수 없어 어쩔 도리 없이 같은 문장을 소환한다. 잡념을 얼어붙게 하고, 그 위를 내달리는 열 개의 손가락.


2025년 부천아트센터 영 프런티어 시리즈 네 번째 무대는 피아니스트 김선민. 쇼팽의 <스케르초 2번>을 한동안 떠올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연주에 앞서 준비한 손수건으로 건반을 쓰다듬듯이 닦고 피아노 한쪽 위에 올려놓았다. 직전 연주에서 지었던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내며 두 손을 무릎 가까이,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새로운 감정을 불러 모으는 걸까. 이어 격한 타건이, 현의 울림이 공연장을 메웠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타 뮐러의 대표작 『숨그네』를 생각했다. 시베리아 수용소 수감자인 아들과 같은 또래에게 감자수프를 건네는 노파를. 뜨거운 수프를 허겁지겁 먹다가 콧물 흘리는 소년을. 노파가 소년에게 내미는 손수건을.


하얗고 깨끗한 손수건은 콧물 대신 소년 레오의 마음을 닦는다. 하루 더 생존한 만큼 하루치 인간성을 상실해야 하는 수용소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한다. 누더기 내면에 다시 자리한 인간성이었다, 손수건은.


어떤 피아니스트의 손수건은 피아노에게 ‘피아노성’을 잃지 않게 하는 도구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4월 교향악축제 시즌에서 전주시향과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을 협연한 아르세니 문 역시 같은 상념에 빠지도록 부추겼는데 김선민은 한 걸음 더 내딛게 한다. 그는 경건함 위에 쌓아놓은 감정으로 연주했다. 과감함과 과격함이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도입부가 지금껏 생생하다. 꽤 많은 연주자의 <스케르초 2번>을 감상했지만, 유동성을 잠재우는 결빙점을 보여주고 그 아래 감춰진, 얼음이 잘려 나가면 칼날이 될 수도 있음을 드러낸 순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맞다, 열 개의 스케이트 날이 분명하다. 날카롭게 얼음 위를 지치다 유려하게 미끄러지는.


쇼팽의 음악과 더불어 리스트의 <돈 주앙의 회상>도 특별했다. 열정의 태풍 안으로 들어가면 그 중심에는 해학이 자리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를 하나의 악기로 압축하고 창조한 작곡가의 시도가 반짝였음을 피아니스트는 알려주었다.


3, 4년간 일상을 함께한 곡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했다. 쉽게 질리는 성향이라 같은 곡을 연습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다르다고 했다. 반복 연습할 때마다 매번 다른 감정이 찾아와서 매번 새로운 음악이 되었다고 했다.


작품 본질에 대한 탐구는 그 끝을 알 수 없으므로 모든 연주는 초연이다. 이는 언젠가 김선민의 무대를 다시 관람해야 할 까닭이다.


김선민 포스터1.jpg ⓒ 부천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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