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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리버스, 발레리노

<2025 발레축제 ‘라이프 오브 발레리노’ >

by 아르뛰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부분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은 게 아니라 무대에 서 달라고 매달려야 했단다. 발레와 남성을 연결하여 생각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므로 남자 무용수 구하기 어려웠단다. 발레리나를 상대할 발레리노 부재는 작품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상연조차 버거운 일이었을 게 자명했다. 호랑이 담배 먹을 적 에피소드가 아니다.


전반적인 발레의 성장과 무엇보다 그저 발레리나를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에 불과한 역할이 아닌, 독보적인 존재로 거듭난 발레리노의 비상이 사회의 인식을 전환하고 있다. 근래 예능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가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온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전부터 자기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묵묵히 걷고 있는 수많은 남자 무용수의 영향력이다. 그들 덕분에 성공적인 방송 제작도 가능했던 게 아닐까.


올해로 15회째 맞이하는 대한민국 발레 축제 무대를 두 번 찾았다. 먼저 5월 31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광주시립발레단이 올린 희극발레 <코펠리아> 무대를 관람했다. 프란츠와 그의 약혼녀 스와닐다, 괴짜 과학자가 만든 인형 코펠리아의 기묘한 삼각관계를 들리브 음악과 맞추어 유쾌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발레 축제 대표 프로그램을 자리매김한 <라이프 오브 발레리노>를 6월 8일 마지막 회 공연으로 관람했다. 토월극장을 가득 메운 환호와 함성이 막을 올렸고 이십여 명의 발레리노는 열정으로 화답했다.


우아함을 감추지 않은 역동성은 고백이기도, 한편으로는 고뇌이기도 했다. 숙명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그들은 반복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반복은 우리의 언어다.


무대 영상에 비친 문장을 천천히 읽어 보았다. 유연성 확보와 근력 유지를 위해 스트레칭과 운동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지. 조금 더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같은 동작을 끝없이 연습하고 도전하는 인내심 장착은 필수일 테고. 짐작하지 못하는 그들의 일상까지 다가오는 듯했다. 어쩌면 끝없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또한 반복에 포함될 것이다. 자기 한계와 수없이 마주하고 때때로 넘어서는 것 역시.


<코펠리아>의 희극성을 닮은 유머도 묻어 있었다. 콩쿠르에서 보여준 몇 분으로 입시와 입대의 갈림길이 결정되는, 웃기면서도 아픈 이야기. 유회웅의 안무를 연습하는 내내 웃음이 흐려지지 않았을 것 같다. 기본 동작 익히는 장면에서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성장한 스스로가 대견했을지도, 여전한 목마름에 눈을 부릅떴을지도.


막은 진작 내렸으나 오토리버스 버튼을 해제하지 않은 발레리노 때문에(덕분에) 아직도 머릿속 무대에서 재상연하고 있다. 바발디 <사계>의 ‘여름’ 3악장의 빠르고 거센 선율과 함께 흘러가듯 춤추던 발레리노의 실루엣을 기억한다. 결국 몸으로 완성한 곡선이 모두 달라서 더 반짝였다. 군무 무대에서는 물결을 수놓는 황금 비늘이 되었다.


어둠에서 대기하다가 순서대로 조명의 빛줄기 샤워를 받으며 찰나의 움직임을 표현할 땐 내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가벼워져서 올라갔다. 올라가니까 눈이 감겼다. 자꾸만.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 앞의 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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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저감을 위해 큐알코드 프로그램을 제작한 점은 만족스러웠으나 모든 무용수 사진을 싣지 않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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