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부모님의 특징을 모아본 글.
한 번 나 관련해서 글 써봐.
엄마같은 사람 없을 걸?
엄마는 엄마대로 ‘MZ’(정작 자녀들은 굳이 티내거나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 단어)스럽고, 개방적인 사고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 부모님들이 하시는 흔한 착각이다. 티비에서 나오는 몇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요즘 젊은 애들은 이런다며? 진짜 너네 세대는 독특한 것 같아” 이러는 경우가 허다하거나, “자만추 알아? 그것도 몰라? 자연스럽게 만남 추구 라던데? 너는 엄마보다 그런 거를 더 모르냐?”라며 나보다 젊은 지식을 뽑내기도 한다.
회사에서 꼰대 테스트 했는데,
거의 만점 나왔어. 아마 속으로 너 또래 밑에 후배들이 아빠를 꼰머라고 생각했을거야
직장에 다니시는 아버지는 이런 말들을 몇 번이고 한 적이 있었다. 본인이 꼰대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은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 또 아래 세대와 구분지으면서 ‘다름’을 만들고 인정하는 경향처럼 말이다. 아버지가 본 우리 세대 회사원들은, 6시만 되면 ‘칼퇴’를 하고 주말엔 자기계발을 열렬히 하면서 회사 연락은 일절 차단한다. 필요없는 회식에는 가지 않고, 부당까지는 아니더라도 본인이 이해가 되지 않는 상사의 부탁이면 줄곧 거절을 잘하는 세대. “아빠 제발 회사나 회식자리에서는 그런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썰렁해질 유머 하지 마세요. 다들 웃고는 있어도 진짜 웃는 게 아닐 거예요” 라며 주말 가족 식사 자리에서 넌지시 어린 세대로서 충고를 드리고는 한다.
우리 엄빠는 이렇게 다른 가정처럼 평범하다. 사실 이런 대화를 하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된다. 무뚝뚝한 파워 경상도 남자이신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사고로 키워진 인재이고, 파워 I인 엄마는 말수 자체가 적고 T성향이 강해 공감보다는 해결책 제시를 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부모 st였기 때문이다. 결혼 20년차가 되어서야 각자 어느 정도 포기하고, 해탈하고, 양보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서로 분위기가 온화해지고 가정이 화목해졌다(?).
경상북도 어디쯤에 본적(이라는 단어를 나는 주민등록증을 떼면서 처음 알았다. 우리가 이런 곳도 살았었냐고, 여기가 어디냐고 묻곤 했다)을 둔 아버지는 3남 형제 중 둘째이다. 세 형제 중 제일 다르게 생겼으나 이상한 유머 센스로 두 분이 형제임이 틀림없는 큰아버지와 도련님처럼 형님들의 많은 아낌을 받아 자란 작은 아버지, 그리고 효와 우애를 끔직이도 중요시하는 우리 아빠 이렇게가 피를 나눈 사이이다.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친척들은 대구에 거주하고 아빠만 30년 전 상경해서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고 가정을 꾸려나갔다. 그러다보니 10년 전 친할아버지•친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명절만 되면 며칠 전부터 아주 들떠서 차로 왕복 16시간 이상 걸리는 곳을 가는 것을 좋아하셨다. KTX가 아닌 굳이 자차를 이용해서 6시간씩 오줌 참고 내려가면 뼈 빠지게 일하시는 여자들을 뒤로하고 먹고 눕고 티비보는 남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낸 뒤 먹는 밥상에서도 남자들만 제대로 앉아서 깨끗한 음식을 먹고, 아이들과 엄마들은 다 먹고 나온 자리에 남은 음식들과 썼던 식기도구로 끼니를 떼우고는 했다. 아직도 생각나는 밥풀 하나와 고추장 묻은 내 앞 숟가락. 아버지의 효심과 우애는 우리가 본받을만 함에 의심이 없다. 그러나 그걸 이유로 상처를 받은 우리 가족과(특히 엄마) 성차별이 베이스 된 문화는 지금에서라도 사라져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할이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그 변화는 시작되었다. 갈 때마다 상처받고 힘들어했던 미주(가명)씨는 명 전후로 아빠랑 갈등을 겪고 이혼을 이야기 할 정도로 큰 말다툼이 오갔다. 당연히 우리 남매에게도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이 끼쳤다. 부모가 이혼을 하네마네 몸싸움을 벌이는데 어느 자녀의 정서가 안정적이겠는가? 이후 명절만 되면 우리 남매랑 엄마는 친정집으로 피신가거나 아예 여행을 갔다. 사실 그래서 명절기억이나 향수가 거의 없다. 아빠도 처음에는 혼자서 가다가, 갔다오면 가정이 냉랭해지니까 안 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사가 사라졌다. 큰 집에서 늘 하던 제사가 간소화되다가 사라졌고 지내도 남자들이 준비하고 그들끼리 지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게 맞는 일이다. 그들의 조상이지 외간사람인 아내들의조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할머니까지 돌아가시자 그냥 명절되면 밥 먹고 여행가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 세대의 친적 언니오빠동생들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더이상 경상도의 ‘경’자만 들어도 분노가 치밀지 않았던 미주(가명)씨. 그 20년의 상처를 아무는데 오랜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음에도 가족을 위해서 기꺼이 위해주었다. 2022년 올해 엄마가 상처 받을 눈치 보지 않고 친척언니동생을 만나러 1박으로 갔다왔었고 아빠도 휴가 때 차 자랑하러(뜬금 소소하고 하찮운 귀여움 포인트) 1박으로 내려갔다가 일찍이 올라왔었다. 가정에 평화를 가져온 반제사 문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