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우물

by 미온

서른을 갓 넘긴 그는 이미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의 짐을 지고 있었다. 모니터 속 주식 그래프의 푸른빛이 밤마다 그의 얼굴을 차갑게 비추었다. 그 빛은 심해처럼 깊어, 오래 바라보면 숨이 막혔다.

‘더 떨어지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모두 던져버려야 하나.’


그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새벽은 늘 정시에 찾아왔고, 알람은 방 안의 공기를 가르며 그의 불안을 깨웠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 끝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힌 그의 뇌였다. 어느 날, 그는 낡은 서랍 깊숙이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청동 열쇠 하나를 발견했다. 묵직하고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홀린 듯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아파트 지하실로 내려간 그는,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침묵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낡은 우물을 발견했다. 현대식 아파트 지하실에 우물이라니, 상식 밖의 일이었다.

우물가에는 기묘한 노인이 앉아 레코드를 닦고 있었다. 노인은 그를 보자 오래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자네가 가진 열쇠, 잘 어울리는군. 여긴 상실의 우물이라네. 주식 그래프의 푸른 빛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이 아래에 가라앉아 있지."

그는 우물을 들여다봤지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

"그래. 설렘이나 소박한 저녁 식사 같은 것들. 부를 쫓느라 무심히 지나친 소중한 일상이지."

노인은 턴테이블 위 레코드를 올리고 재즈를 흘려보냈다.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나? 열쇠를 내게 주면 우물 속으로 내려갈 사다리를 빌려주지. 하지만 조심하게. 공포가 환영이 되어 붙잡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주머니 속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니요, 난 내려가지 않을 겁니다."

노인은 미소만 지었다. 그는 심장이 터질 듯 뛰며 지하실을 빠져나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시간 감각마저 흔들려 있었다.


청동 열쇠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잠든 그는, 다음 날 아침 이상한 평온을 느꼈다. 주식 앱을 켰지만, 빨간 상승 그래프도 파란 하락 그래프도 없었다. 화면은 끝없는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공포는 사라지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잠시나마 자유로웠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청동 열쇠 대신 메모 한 장이 있었다.

[ ‘설렘’의 주파수를 맞추는 중입니다. 볼륨을 너무 높이지 마십시오. ]


그는 처음으로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보다, ‘오늘 저녁엔 아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라는 사소한 기대를 품었다. 손실의 저주는, 우물을 마주한 순간부터 조금씩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출근길 지하철, 그의 손에는 초록빛 숲만이 담긴 스마트폰 화면이 있었다. 불안은 없고, 차가운 물 한 잔처럼 해방감이 밀려왔다. 회사에서도 컴퓨터 화면은 초록색으로 가득했고, 동료들의 소리는 먼 파도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메모를 떠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그날 저녁, 그는 오랜만에 정시에 퇴근해 집 근처 마트에서 치즈와 와인을 샀다. 평소라면 주식을 떠올리며 망설였을 선택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자, 아내의 표정이 놀랐다.

"오늘 어쩐지 달라 보이네. 무슨 일 있었어?"

그는 웃으며 와인 코르크를 땄다.

"별일 없어. 오늘은 그냥 당신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고 싶었을 뿐이야."


그날 밤, 그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숫자의 공포도 없는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새벽, 스마트폰 화면에 하얀 글씨가 나타났다.

[ 주파수가 맞춰졌습니다. 이제 당신의 손으로 직접 볼륨을 조절할 차례입니다. 아파트 지하실 우물가로 오십시오. ]


그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잠든 아내를 바라본 뒤 지하실로 내려갔다. 철문을 열자, 우물가에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제 그는 두려움 없이, 한 계단씩 상실의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끝이 단단한 바닥에 닿자, 작은 라이터 불꽃이 어둠을 밀어냈다. 눈앞에는 서른 살 무렵 아내와 살던 작은 신혼집 거실이 펼쳐져 있었다. 과거의 자신이 소박한 행복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자신과 마주했다. 잃어버린 설렘과 사소한 대화의 기쁨을 하나씩 되찾으며, 이제 스스로 삶의 볼륨을 조절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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