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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an 28. 2024

지옥락(地獄落)

눈 뜨는 순간 펼쳐진 지옥 -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스포를 원치 않는 분은 뒤로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물론 이걸 보고 작품을 본다고 해서 그 강렬함이 줄진 않겠지만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예민함이 있습니다. 그걸 무던하게 푸는 사람이 있고 예민하게 갈아내는 사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군가에겐 별일 아닌 것이 누군가에겐 큰일이 되기도 합니다. 전 세계(당연히 우리나라도 포함이겠죠)의 참사도 누군가에겐 코 후비며 흘려듣는 이야기고 누군가에겐 세상이 무너지며 인간이라는 생물의 기본권이 짓 밝히는 일일 수도 있겠네요. 아무리 가까운 곳에 비극이더라도 누군가에겐 호들갑 누군가에겐 비정함입니다.


 대체로 창작자들을 보면 그런 예민함이 튀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튀어 있지 않더라도 가만히 앉아 그를 관찰하면 아무리 숨기고 있어도 근시간 내로 그게 발견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네요. 아마 그런 예민함이 불편함을 만들고 그 불편함이 무엇인가를 자꾸 만들어 내게 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아마 그런 부분이 있겠죠. 저는 할 말이 너무 많은 데 할 수가 없고 맛없는 걸 참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답답함을 못 참아서 연기를 하고 누구는 외로움을 못 참아서 영상을 찍습니다. 겉은 전혀 예민해 보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에 대한 민감성을 저는 예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런 예민함 때문에 일정 부분 삶에서 서투른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느끼니까요. 답답함을 못 참아서 더 답답한 상황에 빠지고 외로움을 못 참아서 더 외로운 상황에 빠집니다. 저도 역시 할 말이 너무 많기에 점점 더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빠지네요.  


 사람들은 각자의 예민함이 있습니다. 견딜 수 있는 것 못 견디는 것 다 다르기 마련이죠. 근데 삶 자체가 예민성을 자극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런 종류의 예민함에 눈뜨는 순간 삶은 그 즉시 지옥으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하나도 변한 것 없는 삶에 못 참는 예민함이 하나 생긴 죄로 그 삶은 파멸에 이르러야만 하는 운명을 부여받습니다.





일기와 편지를 넘나드는 괴인...


 우리의 삶. 아니 모든 동물적 요소를 가진 생명은 모두 다른 개체의 파괴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식사, 의복, 주거지, 문화, 유흥... 우리가 삶을 위해 향유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개체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죠. 물론 인간만의 특성은 아닙니다. 육식동물은 물론 초식동물마저도 다른 개체를 파괴하며 영양분을 얻으니까요. 하지만 점점 간편해지는 세상(우리가 제육볶음을 먹기 위해 돼지를 사냥하진 않으니까요)에서 우리는 그런 감각들을 많이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같이 분명 파괴 위에 지어진 삶을 누리지만. 과거의 사냥꾼이나 전사들처럼 그것을 인식하고 경외하고 공포스러워하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죠. 생명에 감사를 보내는 피의 의식들은 그 맥이 끊긴 지 1000년은 넘은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필연적 파괴를 예민하게 느끼는 여자가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채식주의자> 중편 3개의 핵심 영혜입니다. 그녀는 모든 동물적인 파괴를 폭력이라 인식하고 그 모든 것을 거부하려 합니다. 



'젖가슴으론 아무도 죽일 수 없으니까.'


'아무것도 죽일 수 없'는 젖가슴처럼. 아무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서있는 식물들처럼.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폭력이라고 인식해 버린 모든 생존을 위한 파괴들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자신의 삶을 저 편으로 밀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영혜의 이런 예민함은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사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만든 트라우마에서 시작됩니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영혜는 잘 견디는 어머니의 온건한 성품을 물려받은 죄로 아버지의 폭력성을 잘 물려받은 동생과 달리 해소할 수 없는 폭력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자라납니다. 폭력에 대한 혐오감과 거부감 그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영유하던 시절에도 약간은 삶과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고 삶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식사'에 집착을 합니다, 하지만 결혼을 통해 아버지와 격리되며 호전되는 듯했으나. 물리적 폭력과 다른 고압적인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하는 남편과 5년을 참고 살다 결국 트라우마의 재발현과 함께 그녀는 터져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개가 자신을 문 기억. 그리고 그 개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까지(오토바이에 묶여 질질 끌려다니다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 딸을 물었기에 벌준 것이 아니라.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혐오스러웠던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개를 맛있게 먹었던 본인이었겠죠. 그녀의 모든 삶은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던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기가 숨 쉬는 것조차 폭력의 온상이라는 걸 감각한 순간. 그녀의 삶엔 지옥이 열립니다.


 그 후 그녀는 폭력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더욱더 폭력적인 상황에 마주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모든 동물성을 퇴화시키려다, 죽음 직전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녀는 단지 아무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본인이 상처 입기 싫어서였을까요. 그녀는 결국 퇴행적 진화에 성공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엔 식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채식주의자> , <몽고반점>, <나무 불꽃> 모두 충격적이지만. 아무래도 제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건 <채식주의자>였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자신의 편린을 발견하면서 섬찟한 기분을 느끼곤 하는 모양입니다. <기생충>을 봤던 우리들처럼.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여태까지 즐겁게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혐오스럽고 불결한 것이라 느껴지면 어떡하나. 그럼 내 주변의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삐끗한 죄로 저는 지옥에 빠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이질감을 삶에서 느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따라오는 자책. 내가 너무 예민한가?


 영혜는 예민한 사람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영혜는 실제로 5년간 평범한 아내의 역할을 잘해왔고 죽음과 삶의 경계가 흐릿해져 있던 유년기를 넘겼으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잘 버텼다고 그녀가 계속 버틸 수 있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녀에겐 그 예민함이 실제적으로 다가왔고 그걸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니까요. 그녀는 꿈에서 깨었을 뿐인데 한순간에 삶이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사실은 삶은 원래 지옥이었는데 여태까지 꿈을 꿔왔던 걸지도 모를 일이지만. 언제나 많이 느낄 수 있는 건 썩 좋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무딘 사람이 훨씬 쉽게 쟁취할 수 있습니다. 영혜의 남편이 영해의 상태는 어떤지도 모른 채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한 것처럼.  


물론 <나무 불꽃>의  언니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영혜같이 예민하게 태어난 아이도. 폭력적인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차갑고 무심한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형부의 접근을 거부했다면, 차라리. 더 용기 있는 언니가 있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를'일입니다만. 언제나 if 스토리는 무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결국엔 이렇게 되어 버린걸요.


 우리는... 아니 너무 죄송스러운 말입니다. 몇몇 이들은 이미 지옥 속에 살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눈 한번 잘 못 돌리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져야 하는 그곳. 단지 아니라고 믿으며 눈 감고 버티고 있는 것일 뿐.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고통받고 깎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들이. 사실 나를 힘들게 하고 망가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나를 존속시켜준 사람들 그리고 책 그리고 은인. 사실 이 만성의 피로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생각만으로도.


 지옥은 우리가 못 본 채 하는 새에도 입을 크게 벌리며 우리가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삶을 인식하는 건 우리니까요. 모든 해악과 참선은 결국 다 우리 안에 있습니다만. 여태까지 나 자신을 이겨낸 사람은 인류상에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버티다 버티다 꺾이게 되고 지옥을 선택할 수도 아니면 차라리 지독한 무지(늙어서 추해졌다 배신했다 이상해졌다는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제가 볼 때 이 길을 선택한 걸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그렇게 혐오하던 정치인을 갑자기 찬양할 때. 그는 지옥을 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를 선택할 수도 있겠죠.


 저도 확신은 없습니다. 지옥이 어느 순간 찾아올지. 저도 영혜처럼 삶을 포기하더라도 퇴행적 진화를 선택할 수 있을지. 또 모르죠 저는 생각보다 무던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세계는 언제나 어렵고 if는 영원히 없습니다. 지금에 최선을 다하며 지옥에 떨어진 그날 후회라도 하지 않을 수 있게 할 뿐. 그게 저에게 미안하지 않을 단 하나의 방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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