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고 싶지 않은 날 동굴에 갔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by 소요

집에 가고 싶지 않구나.


비 오는 날 점말동굴에 가자고 하니 남편이 말했다. 그렇다.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병든 엄마가 누워있는 집을 잠시나마 떠나 있고 싶다. 죽음을 기다리는 정적인 집, 사람들과의 교류가 단절된 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가 갇혀버린 집이 아닌 곳으로 가고 싶다. 이왕이면 생명의 에너지가 넘치고 개방되어있는 곳으로 아픈 엄마가 아닌 남편과 딸과 함께 가고 싶다.


엄마, 그레트헨 너무 해. 어떻게 남자에 눈이 멀어 엄마를 죽게 하냐고. 너무 슬퍼.


만화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딸이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딸의 눈높이에 맞게 호응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인간은 그런 존재야.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라고 냉정하게 말했었다. 그때는 관념적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구체적인 나의 현실이 되었다. 아파 누워있는 엄마로부터 잠시라도 멀어지고 싶은 마음, 이럴 바에는 엄마를 차라리 푹 재우고 싶은 마음은 딸이 너무하다고 했던 그레트헨과 다를 바가 없다.


원래 가까이 사는 사촌 오빠와 함께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 내가 나갈 수 있는 시간은 엄마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어서 시간 약속을 하지 않고, 우리가 나갈 때 전화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빠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한동안 바빴고 이번 연휴에 푹 쉰다고 하더니 깊이 잠든 모양이다. 때마침 비가 쏟아진다. 근처 카페로 가서 오빠 전화를 기다려보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록 전화가 오지 않는다. 남편이 집에 가자고 한다. 아니 집에 가고 싶지 않다. 어디든 가고 싶다.


피난처로 생각해낸 곳이 점말동굴이다.


점말동굴은 역사 책에서나 보던 구석기 시대 유적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유적지라는 거창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동굴 하나만 달랑 있고 볼 게 없어서 그 지역 사람들도 잘 모르고, 찾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비오는 어린이날 인파를 피해서, 또 나의 어렵고 어지러운 현실의 도피처이자 피난처로 딱이다.


거기 가자!

거기 뭐가 있어?

아니 뭐가 없어!

뭐가 없는데 왜 가?

그냥. 뭐가 없는 데로 좀 가고 싶어.


비 오는 날 어디 나가는 걸 싫어하는 남편과 딸이지만 집에 가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따라나선다.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다. 내비게이션에도 잘 나오지 않고, 표지판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낡아서 글이 지워진 표지판을 발견하고, 긴가민가하면서 산 속으로 들어간다. 산 중턱에 출입금지 테이프가 보인다.


차를 세우고 금지 테이프선을 넘어간다.


센과 치이로의 첫 장면처럼 기묘한 기분이 든다. 차라리 영화에서처럼 이 선을 넘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면 좋겠다. 그게 또 다른 시련일지언정 새로 시작하고 싶다. 비 내리는 산 속은 흡사 수묵화처럼 보이는 풍경에 갑자기 형광 초록색 땡땡이 무늬에 배가 주황색인 개구리가 뛰어든다. 이상한 나라 앨리스처럼 저 개구리를 따라가면 이상한 나라로 갈 수 있을까. 제발 무당개구리가 우리 가족을 엄마가 없는 이상한 나라로 데려갔으면 좋겠다.


동굴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물 만난 개구리들은 반짝 움직임만 느껴질 정도로 가볍게 뛰어가는데, 우리의 발걸음은 비에 젖어 점점 무거워진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고 나뭇가지들이 축 늘어져 원시의 열대우림의 정글 같은 분위기가 펼쳐진다. 한참을 걷는다.


마침내 동굴이다.


거대한 절벽에 아시바가 쌓여져 있었고, 보호막으로 덮혀 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구석기인들이 살았다는 동굴은 깍아놓은 절벽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발굴과 유적지 개발로 인해 폐쇄되어 동굴에 들어갈 수는 없다. 결국 어디론가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뭐가 없는 곳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비에 젖은 채 결국 아픈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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