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방지용 캠핑 의자
캠핑 의자 좀 갖다 줘.
오늘 남편이 온다기에 부탁했다. 팔걸이 나무로 된 캠핑 의자, 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집에는 캠핑 의자가 꽤 여러 개가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게 아닌 걸 가지고 올까봐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내가 콕 집어 가져와 달라고 한 캠핑의자는 우리가 처음으로 장만한 캠핑 용품이다. 회사 복지 포인트 사용을 미루고 미루다가 소멸되기 직전 급하게 사용해야 해서 캠핑 용품을 사는데 모두 소진했다. 캠핑 의자이지만 소파보다도 편해서 거실에서도 사용하곤 했던 애정하는 의자다.
캠핑 의자가 오면 베란다에서 나만의 캠핑을 할 것이다.
엄마의 베란다였을 때는 베란다에 나가볼 엄두가 안 났다. 김치 담그고 장 담그고 곰국 끓이고 나물 말리던 마당이나 다름 없던 곳이어서 살림도 많고, 혼돈 그 자체였다. 한동안 엄마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을 때 엄마가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아서 나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자니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서 나간 것이 베란다였고, 나간 김에 베란다 청소를 깨끗하게 했다. 청소도 했겠다, 날씨도 좋아졌겠다, 베란다에 나가서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는다만) 콧구멍에 바람도 넣고, 먼 산 바라면서 멍도 때리고, 엄마가 너무 좋아하던 노을도 바라보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삼겹살도 구워먹을 것이다.
가구는 처음 가져온다.
캠핑 의자를 가구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엄마 집으로 옮겨 온 것 중 가장 큰 살림이다. 처음 엄마 집에 올 때는 1박 2일 정도의 가벼운 여행을 가듯 짐을 쌌다.
속옷 1세트, 양말, 휴대폰 충전기, 책 1권
그리고 100일 전 주거처를 엄마 집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는 3박 4일 정도의 짐을 가져왔다.
여행용 화장품과 샴푸, 잠옷, 고데기, 노트북, 책 여러 권
한 달 뒤에는 여행용품이 아닌 것이 처음으로 왔다.
내가 집에서 쓰던 데스크 조명과 수제 요거트 제조기
엄마 집 형광등 빛을 참을 수가 없어서, 조명을 다 바꾸지는 못하고 내 방에서만이라도 전구색 조명 아래서 책도 읽고 영상도 보면서 쉬고 싶었다. 조명 하나면 적어도 밤에는 나만의 휴식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수제 요거트 제조기는 딸 애기때 쓰고 묵혀둔 것인데 매일 요거트 사먹는 아빠에게 필요할 것 같았고, 아기 키울 때보다 잘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아웃도어 용품을 가져와달라고 했다.
캠핑 의자, 크록스, 가벼운 러닝화
엄마가 잘 때 베란다에 나가서 커피도 마시고, 엄마가 자는 시간에는 아빠에게 엄마를 맡겨두고 크록스 신고 나갈 것이다. 장도 보고 도서관에도 가고. 그리고 새벽 러닝도 해보려고 한다. 좀 뛰면 기분이 나아질까 해서. 4월 한 달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엄마가 죽을 거 같아서 집에만 있었다. 집에만 있었더니 내가 죽을 거 같다. 이제 좀 나가자. 쉬는 시간에는 베란다에 나가서 나만의 캠핑을 하자. 그리고 더 멀리 나가자. 집에만 틀여박혀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다. 집에만 틀여박혀 있다가는 엄마를 죽일까봐 두렵다. 살인방지용 캠핑의자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