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엄마의 도토리묵
엄마의 냉동고를 싹 비웠다.
엄마의 냉동고를 보면서 엄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엄마가 가족들에게 무엇을 먹이고 싶은지를 볼 수 있다.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던 것은 옥수수였고, 그다음은 직접 만든 쑥떡, 만두, 데친 토마토, 곰탕, 땅콩이 나왔다. 옥수수와 쑥떡은 엄마와 아빠가 좋아하고, 만두와 땅콩은 동생을 위한 거였고, 데친 토마토는 엄마 자신을 위한 거다. 엄마는 토마토를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뭔지 모르는 미스터리한 한 덩어리가 나왔다.
국을 얼린 것 같기도 하고, 떡 같기도 하고 아무리 뜯어봐도 뭔지 모르겠다. 아빠도 모르겠다고 한다. 엄마에게 물어도 역시 묵묵부답. 일단 녹여보자. 색은 거무튀튀하고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가루 같은 게 느껴진다. 국은 아니다. 떡도 아니다. 도토리묵 재료인 도토리 가루 앙금을 얼린 거였다.
알지 알지. 엄마, 아빠가 도토리묵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파는 거 말고 자기가 직접 만든 것만.
가을이면 구경 삼아 운동 삼아 가까운 산에 돌아다니면서 도토리를 줍곤 했다. 나는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엄마의 도토리묵을 먹어 보고는 말리지 않았다. 엄마가 만든 도토리묵은 시중에서 파는 묵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식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죽, 두부, 묵 같은 물컹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만든 묵은 탱글탱글한 식감이 최고였다. 엄마는 묵을 쑤고 난 뒤 내 손에 올려주고 먹어보라고 하지 않고, 만져보라고 했다. 부들부들, 탱글탱글한 촉감도, 식감도 최고였다. 입에 처음 닿았을 때 푸딩같이 부드럽지만 탄력이 좋은 젤리 같아서 입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고 그렇다고 씹는 수고로움을 요구하지 않고도 입안을 활기차게 만들었다.
이거 할머니가 좋아하잖아.
딸도 등하굣길에 도토리를 보면 주워왔다.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오며 가며 한 알 한 알 주워온 것을 모으면 한 봉지가 되곤 했다. 엄마의 도토리묵을 얻어먹어본 친구들도 가을이면 산에 놀러 갔다가 도토리를 주워와서 엄마 갖다 드리라고 내놓곤 했다. 도토리를 주워본 사람은 안다. 한 알 한 알 줍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도토리에서 묵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수준이다. 인터넷에서 공부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1. 주워온 도토리를 물에 담근다. 그래야 벌레가 안 생기고 나중에 껍질도 잘 까진다.
2. 도토리를 건져서 햇빛에 잘 말린다. 껍질이 저절로 쪼개질 때까지 햇빛에 말린다.
>>> 여기까지는 나도 해봤다
3. 껍질을 깐 도토리 알맹이를 물에 담가놓았다가 방앗간에 가서 갈아온다.
>>> 여기까지는 엄마에게 들었다. 방앗간에 가서 빻아올 거라고. 이후 과정은 모른다. 물어보니까는 아빠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후 과정, 그러니까 도토리를 가지고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는 진짜 힘든 과정은 엄마가 혼자 다 했다는 얘기다.
4. 방앗간에서 갈아온 도토리 가루를 자루에 담고 다시 물에 담가놓는다.
>>> 엄마 집 청소하다가 도토리색으로 물든 큰 자루를 봤었다.
5. 계속 물을 대고 토토리 자루를 누르고 발로 밟으면서 앙금을 빼낸다. 이걸 여러 번 반복하면 도토리묵처럼 거무퉤퉤한 색이 된다고 한다.
6. 자루에서 빠져나온 앙금을 고운 체에 여러 번 거른다. 여러 번 안 거르면 묵이 잘 안 된다고 한다.
7. 앙금을 가라앉혀서 말리면 그게 도토리묵 가루다.
아직도 도토리묵이 아니다. 팔 떨어지는 저어주기가 남아있다.
커다란 솥에 도토리묵 가루와 물을 붓고 계속 저어서 만든 반죽을 식히면 그게 도토리묵이다. (와, 듣기만 해도 피곤하다) 엄마는 앙금을 가루로 만들지 않고 앙금 자체를 얼려놓은 것이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도토리묵은 가루보다는 앙금 자체로 만들어야 더 맛있다고 한다. 이런 앙금인데 함부로 버릴 수가 있나. 묵을 쑤어야겠는데 나도, 아빠도 묵을 쑤어보지 않았다. 아빠는 친구 부인에게 전화를 했다.
도토리묵을 어떻게 쑤어요?
도토리가루의 6배의 물을 붓고 쑤면 돼요.
이건 가루가 아니라 앙금 얼린 건데요.
아, 그렇게는 저도 안 해봤는데, 앙금 얼린 거면 물을 더 적게 넣어야겠네요.
얼마 나요?
글쎄요. 한 4배쯤 넣고 너무 뻑뻑하다 싶으면 물을 더 부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침내 아빠가 묵을 쑤었다. 하지만 진정한 묵이 되지 못했다.
물을 너무 많이 부었는지 결국 묵이 되지 못하고 흐물흐물 거린다. 엄마의 탱글탱글한 탄성이 그립다. 두부에 비유하면 연두부가 되어야 하는데 순두부 같다. 비주얼을 보더니 남편과 딸은 절대 안 먹겠다며 고개를 흔든다. 결국 아빠와 엄마, 내 차지가 된다. 보기보다는 맛있다. 어떻게 맛이 없나. 이 과정을 거쳤는데.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도토리 주워다 주지 말 것을.
집안꼴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아무 말 없이 태평하게 누워있는 아픈 엄마에게 따지고 싶다. 이렇게 힘들게 먹어야 하는지.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그렇게 힘들게 가족들을 먹였어야 하냐고? 이렇게 가족들의 입맛을 고급으로 만들어놓고,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은 죄다 맛없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엄마(9), 아빠(0.5), 나+남편+딸+내 친구들+아빠 친구 부인(0.5)이 합작한 도토리묵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도토리는 절대 줍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도토리를 보면 엄마 생각나서 줍고, 주웠으니까 도토리묵 만든다고 달려들까 봐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