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다 하게 되어 있어요.
딸 그렇게 키워서 뭐 하려고!
촌수까진 모르겠고(알고 싶지도 않고), 먼 친척이지만 가까이 살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시던 할아버지는 식사를 준비하느라고 분주한 엄마와 빈둥대는 나를 보면 엄마에게 호통치곤 했다. 중학생 정도면 할아버지가 보기엔 다 큰 딸인데 집안일 하나 안 시키고 책이나 보게 한다고 혀를 끌끌 차시곤 했다. 딸 공부 많이 시켜봤자 소용없다며, 빨리 취직해서 (남) 동생들 공부나 시키라고 했다.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할아버지의 말투, 억양, 표정, 손짓,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는 정도다. 그래도 엄마는 아무 소리 안 하고 자기 하던 일을 했고, 나는 듣기 싫어서 방으로 들어가거나 집을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우리 집까지 찾아오셔서 그런 소리나 하시는 할아버지도, 그런 할아버지에게 싫은 소리 내색 안 하고 오실 때마다 반갑게 맞이하고 어른 밥상을 차려내던 엄마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엄마도 더 이상 못 참겠었는지 한 마디 했다.
지금 안 시켜도 나중에 다 하게 되어 있어요.
깜짝 놀랐다. 그리 큰 소리도 아니고, 정색하고 말한 것도 아니었지만 엄마의 평소 태도와 비교하면 놀라운 발언이었다. 엄마는 누구에게, 특히 어른들에게 그렇게 대꾸하는 법이 없었다. 왜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면 더 무서운 것처럼 엄마의 한 마디에 할아버지도 놀라셨는지 크게 헛기침을 하셨고, 이내 불편하셨는지 밥상을 차리는데 안 먹겠다고 하시며 자리를 뜨셨다. 그리고 내 기억에 우리 집에 발걸음이 뜸해지셨다.(역시 선 넘는 사람에게는 선을 그어주어야 한다)
할아버지는 대놓고 말했을 뿐이고, 집안 어른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매사에 경우 바르고 어른들에게 예의 바른 엄마지만 딸 교육은 이상하게 시킨다고, 나는 없는 살림에 공부시켜 놨더니 제 잘났다고 돌아다니고 부모도 잘 안 챙긴다고 앞으로 뒤로 욕을 좀 먹었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만의 굳은 신념으로 그 많은 시선과 평가로부터 꿋꿋하게 버티고, 나를 방어해 주었다.
엄마에겐 젊은 날이 없었다.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는 졸지에 처녀 엄마가 되었다.
농사일에, 집안일에, 아래로 동생 넷을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엄마는 학교도 못 가고, 친구들과 놀지도 못했다. 엄마는 나를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족이라는 의무와 책임, 딸이라는 역할에서 일찍부터 해방시키고 싶어 했다. 엄마는 그저 나 개인의 욕구와 욕망에만 충실하라고 했다. 결혼도 꼭 안 해도 된다. 우리(엄마와 아빠)는 우리끼리 알아서 잘 살 테니 우리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고, 맏이라고 동생들도 챙길 필요도 없다고 했다.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놀고 싶으면 놀고, 무슨 일을 하던지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나는 정말 그래도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살았다. 그게 엄마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무슨 기념일 같은 것도, 집안 대소사도 특별히 챙기지 않았다. 어버이날에도 꽃이나 돈을 보내고, 편지를 쓰거나 전화한 적은 있어도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은 없는 거 같다. 음력인 생일날은 맨날 까먹기 일쑤였고, 명절 연휴에도 긴 휴가를 만들어 여행 가기 바빴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어버이날, 엄마와 아빠와 함께 보내고 있다.
엄마가 아프고 병들고 나서야, 바쁜데, 힘든데 절대 오지 말라고 말리던 엄마가 그런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나는 아픈 엄마를 아빠와 함께 돌보며 어버이날을 보내고 있다. 엄마는 정말 알았던 걸까? 배우지 않아도 나중에 다 하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언젠가는 가족이라는 책임을 다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아니다. 엄마는 그런 날이 오지 않도록 진심으로 바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오고 말았다. 엄마에게 살림을 배운 적도 없지만 나는 엄마의 살림을 대신 살고 있다. 엄마에게 요리를 배운 적도 없지만 닥치니까 엄마의 삼시세끼 밥상을 차려내고, 엄마가 하던 식을 따라가고 있다. 그렇다. 사람마다 때가 다르고, 때가 되면 다 하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