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필 머리 하러 가는 날, 비가 오다니. 나간 김에 서점도 가고 쫄면도 먹고 오리라 마음먹었다.
쫄면은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쭉 애정하는 음식이라 어딜 가던 맛있는 쫄면을 찾아 수소문하고 발품을 팔곤 한다. 얼마 전 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쫄면 맛집’이라고 종이에 매직으로 쓱쓱 써놓은 분식집을 발견했고 오늘 거길 가기로 며칠 전부터 벼르고 별렸다.
나, 12시까지 올게.
그렇게 말하고는 신발을 신으려는데
12시까지 돌아온다고??
엄마 특유의 충청도에 토착화된 경상도 억양이었다. 신발을 벗고 뒤돌아섰다.
어! 엄마가 뭐라 말한다!
아빠가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엄마 얼굴에 바짝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통 말을 안(못)하는 엄마가 어쩌다 말 한마디만 하면 아빠와 나는 둘 다 엄마에게 달려든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믿기지 않고,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꼭 다시 되묻곤 한다.
엄마, 지금 뭐라고 했어?
엄마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 말을 다시 듣겠다고 엄마를 재촉하고 닦달하곤 했지만, 이제 쉽게 단념한다. 나 혼자만 들었다면 환청을 들었다고 착각할 법도 하지만, 아빠와 둘이 들은 것이니 환청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언제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메커니즘은 모른다. 엄마는 뇌를 다쳤고, 회복불가능한 손상으로 실어증이 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가끔 이렇게 말을 토해낸다. 엄마가 내뱉은 한 마디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내 몸을 관통하여 하루 종일 온몸을 흘러 다닌다. 엄마가 다시 말해주지 않으니 내가 말했다.
엄마, 나 12시까지 돌아올게!
예정대로 머리하고 서점에 들렀다가 여전히 ‘쫄면맛집’이라는 종이가 붙어있는 그곳으로 갔다. 일하시는 분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중 한 분이 달갑지 않은 시선과 굼뜬 동작으로 일어섰다. 아마 점심 장사를 앞두고 미리 식사를 하는 것이리라. 아, 식사하시는 중에 죄송해요. 식사 다 하시고 해 주셔도 돼요. 쫄면이요. 너그럽고 예의 바르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식사가 다 끝나고 조금 늦게 조리된 쫄면이 나왔다. 스스로 맛집이라고 써붙인 집이기도 하고, 기다리면서 할 일 없어 관찰한 바에 의하면 맛집으로 보이는 그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의외로 맛있었다. 쫄면의 굵기, 딱 알맞게 삶아진 정도, 푸짐하고 얇게 채 썬 야채, 매콤하고 달달한 양념장이 되지도 너무 흐르지도 않게 후룸 하게 알맞은 농도까지 진짜 쫄면 맛집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12시 15분 전, 엄마에게 약속한 12시까지 가려면 당장 일어나서 버스든 택시든 잡아타고 가서 빠른 걸음으로 가서 적절한 타이밍에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물론 엄마는 시간 개념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12시면 자고 있을 시간이다. 쫄면을 마저 먹고 10분 정도 늦게 가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일어났다. 오늘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동안 나는 엄마를 늘 기다리게 만들었다. 엄마와 약속 같은 걸 한 기억은 없지만, 엄마는 늘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웬만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명절이나 생신 때도 나는 여행을 가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오지 않은 적이 많았다.
아마 엄마를 가장 기다리게 했던 것은 3개월 예정으로 떠난 미국 연수였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비자를 두 번이나 갱신하면서 2년을 있었는데, 그곳 생활에 빠져 집에 연락을 제대로 안 했다. 어느 날 친구에게 이메일이 왔다. 제목이 야, 이 미친년아, 였다. 미국에 가서 돌아오지도 않고 연락도 두절된 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던 엄마는 내 친한 친구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가서 친구 부모님을 만나 친구 연락처를 얻었고 친구에게 연락해서 나 좀 찾아달라고 사정했던 것이다. 친구가 보낸 이메일을 받고 나서야 엄마에게 연락을 했는데, 엄마는 뭐라고 하기는커녕 너 잘 있으면 됐다, 잘 지내다가 돌아오라고 하면서 평소처럼 전화요금 많이 나올까 봐 긴 말없이 그냥 끊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왔을 때야 엄마는 마음 놓고 울었다.
버스를 탔다. 과연 엄마가 나를 기다릴까? 버스에서 내렸을 때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접고 뛰기 시작했다. 드라이로 정성스럽게 부풀린 머리는 한순간에 푹 가라앉아 머리에 붙는 게 느껴졌다. 엄마가 이 지경이 되어서야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빗속을 뛰고 있는 나 자신이 얼탱이 없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숨을 헐떡이며 현관 앞에 서니 12시 정각이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젖은 얼굴을 쓱쓱 털어내고 문을 열었다.
엄마, 나 왔어.
내가 돌아왔는데 엄마는 이미 잠이 들어있었다. 엄마는 충분히 많이 기다렸다. 엄마는 나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내가 엄마를 기다릴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