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드는 정도

수박 겉핥기

by 도삽J

소파 위에 옆으로 누웠다.

냥딸(입양한 길고양이 암컷) 수키가 폴짝 뛰어 올라온다. 내 인중 앞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겨드랑이 사이로 쏙 파고든다. 내 팔을 이마로 문질문질하더니 사포 같은 까끌한 혀로 핥는다. 팔 안쪽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가르릉 고르릉.

볼에 닿은 수키 털은 밍크보다 부드럽고 포근하다. 내가 몸을 뒤척이자 깜짝 놀라며 튀어나온다.

네 개의 발이 내 몸을 밟고 넘어간다. 이번에는 살짝 접힌 내 무릎 뒤로 들어간다. 언덕 넘어 굴이나 계곡으로 몸을 숨기는 모양새다. 내 다리에 턱을 괴고는 쫑긋 세운 새까만 귀와 구슬 같은 눈알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방공호에서 머리를 내민 군인 같다.

내 다리를 누르는 수키 앞다리의 무게, 그 누름의 정도와 평균 37도 이상인 고양이들의 체온, 그 온기가 매우 적당하다. 평온하다. 이대로 오랫동안 있고 싶다. 이제부터 ‘꼼짝 마라!‘다. 내가 다리를 움직이는 순간, 수키가 호다닥 자리를 뜰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수키가 주는 만큼의 파고듦이 가장 알맞다. 소파에 누운, 소파와 일체가 된 나를 살포시 채워주는 무게 정도의 깊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여기서 ‘원하는 만큼’은

배우기를 그만두는 시점뿐 아니라 배움의 깊이를 말한다.

나는 한 가지를 오랜 시간 깊게 마스터하기보다

이것저것 배우기를 좋아한다. 변덕에 가깝다. 얕고 넓게 배운다.

그러니까 나의 배움은 ‘수박 겉핥기‘식이다.

어떤 식이냐면,

- 수박 통 모양을 살피고 통을 두드리기만 할 때가 있어.

(추락을 동반하는 암벽등반 외)

- 껍질 모양과 꼭지만 눈여겨보기도 해.

(나와의 약속 헬스 외)

- 수박을 들어서 무게를 가늠하기도 하고.

(절대음감 해금 외)

- 냄새를 맡아보고 반복해서 핥아보기도 하지.

(긴 것은 독서클럽 외)

- 물론 겉을 핥다가 깨진 틈으로 단맛도 봐.

(함께하는 기쁨-발레, 내적 친밀감 최고-글쓰기)

나에게 겉핥기는 그 자체로 꽤 매력적이다.

호기심이 발동하면 냄새를 맡고 안전하여졌다 싶으면 우선 겉부터 핥아야 한다. 혹시 겉핥기를 지속하다가 앞니로 껍질을 갈아서 수박 속을 제대로 파먹게 될 줄 누가 알겠는가?


내 말에 동의라도 하는 듯, 수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