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센티의 로망- 그 높이와 무게
왼쪽에는 발바닥에 구멍이 뚫린 타이즈가 있고 오른쪽엔 구멍 없이 막힌 타이즈가 있다.
구멍이 있는 홀(hole) 타이즈를 하나 꺼내어 가방에 넣었다. 가방 안에는 토슈즈 한 켤레와 흔히 토싱이라고 부르는 발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끼우는 실리콘 토 패드( toe pad) 한 쌍이 들어있다.
오늘은 천 슈즈가 아닌 토슈즈를 신고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는 날이다.
엄마를 닮은 둘째와 막내는 다리가 길고 매끈하다.
장녀인 나와 셋째는 아빠 쪽 유전이 몰빵 된 터라 다리가 짧고 허벅지가 굵다. 거기다 넷 중 나만 허리가 길다. 다행히 얼굴은 작은 편이라 허리를 강조하고 하체를 가리는 옷을 입으면 체형을 커버할 수 있다. 굽이 있는 신발을 신으면 7등신이 된다. 비율 때문에 하이힐은 오랜 기간 포기가 어려운 아이템이었다.
취미 발레를 시작한 첫날, 거울에 비친 내 몸을 직관한다. 마른 몸에 미끈한 다리를 가진 회원들 사이에서, 나는 바닥에 붙어 있는 것 같은 천 슈즈를 신고 점점 바닥으로 꺼진다. 잘 발달한 나의 허벅지 앞 근육이 거울 속에서 올록볼록 요동친다.
“헬스장으로 가면 자연스럽게 어울릴 몸이야.
발레는 내 체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구나!
괜히 시작했나? 다리가 10센티 아니 5센티만 더 길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두 발을 모으고 발뒤꿈치를 들면서 거울 속 모습을 살핀다.
발끝을 최대한 세우고 몸을 위로 쭉 일으켜본다. 제발 길어져라! 속으로 외친다.
얼마 안 가서 그만둘 것 같던 발레를 5년 넘게 하고 있던 어느 날, 회원 중 한 명이 토슈즈 수업을 같이 받아보자는 제안을 했다.
40대 중반에 취발러(취미발레인)가 된 나에게 토슈즈는 애당초 계획에 없었다. 그러나 취발러라면 누구나 꿈은 꾼다. 토슈즈 한번 신어보고 싶다는.
다리가 10센티 더 길어지고 싶다는 나의 소망이 이루어질 유일한 길. 신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 나이에 시작해도 발목에 무리가 없을지 염려가 되었다. 토 수업을 받는 두 살 어린 발레 메이트의 권유도 있고, 65세 회원이 토를 신고 레슨 받는 모습을 보고 나니 나도 한번 신어 볼 용기가 생겼다.
곧 공연이 시작된다.
이 순간 토의 무게가 모래주머니, 아니, 쇳덩이처럼 느껴진다. 지금 토의 높이는 장대 다리 걷기를 위해 장대 다리에 서 있는 사람처럼 위태롭다.
당장 천 슈즈로 바꿔 신고 무대에 오르면 아무 걱정 없이 날아오를 거 같다. 혼자라면 도망이라도 가고 싶을 만큼 불안했을 것이다. 넷이 하는 군무니 참 다행이다.
음악이 나온다.
토슈즈를 신고 새틴 스트랩을 야무지게 감아 묶은 핑크색 발 8개가 무대 위로 출발한다.
과연 실수 없이 무사히 공연을 마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