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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Aug 03. 2022

< 감각의 시어 >: 체험의 체험

<감각의 시어> 展: 최만리 미술관

체험이라고 말하고 경험이라고 말하는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체험은 몸 체(體) 자에 시험 험(驗)으로 쓰인다. 경험은 지날 경(經)시험 험(驗)으로 쓰인다. 이 뜻풀이를 통해서 체험과 경험의 차이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경험은 '지난 ', 즉 이미 현재적이지 않은 기억에 대한 판단 혹은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유한하고 유한함이 주는 해석 가능성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졌다. 반면 체험은 ‘몸體이 외부와 만나는 그 순간의 직접성’에 대한 사유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합적인 혹은 판단 가능한 사유 이전의 사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언제나 무한한 사유다. 체험은 또한 몸의 만남 자체에 대한 사유이기에  현재성의 사유 혹은 첫 만남의 사유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몸의 만남은 언제나 '현재'에 이루어지고 바로 이 이유로 인해 언제나 과거의 만남과는 다른 첫 만남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최만리 미술관에서 보았던 최인수 작가의 작품을 떠올려보자. 둥그스름한 원통형의 덩어리 , 단단한 느낌을 주는데 차갑지만은 않고 따뜻한 이상한 느낌, 뭉근 느낌이라 하면 너무 무겁고 몽근 느낌이라 하면 너무 가벼운 느낌. 처음에는 점토 같은 것이 두텁게 뭉쳐진 듯하였으나 가까이서 보니 철과 같은, 그것도 공장에서 쓰일 것 같은 철표면의 느낌. 그래도 한 발 물러나면 느껴지는 점토의 느낌 때문에 쓰인 재료가 궁금해 확인해 보았다. 주철이었다. 흙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니 감촉이 표면 자체에서 느껴진다기보다 표면과 거리를 두며 느껴졌다. 최인수 작가가 어릴 적 손으로 만지던 흙의 감각, 그것의 기억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두에 개념화한 '체험'의 이해를 바탕으로 바라보자면 이 '감각' 은 언제나 '새로운 피부’(언제나 조금씩 다른, 즉 성장 또는 노화로서 변화하는 피부이기 때문에)와 언제나 ‘새로운 흙’(같은 입자의 구성, 같은 농도, 같은 습기 등을 가진 흙은 그 순간에만 있기 때문에)의 만남 그 자체를 감각하는 것이다. 이 온전한 현재성을 담지한 둘의 첫  만남이 작가가 지향(intention)하고자 하는 것이고 또는 ‘흙과 피부의 긴장(tension) 안(in-)’에 머무르고자 함’ 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느껴지는 것을 단순히 어릴 적 경험들 혹은 추억 속 이야기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재료가 되는 주철 바깥으로 작품의 형상처럼 솟아 나오는 흙의 따뜻하기도 하면서 찹찹한 감촉이 ‘추억’과 ‘경험’ 이전의 사유, 달리 말해 ‘머리의 사유’가 아닌 ‘살갗의 사유’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 첫 만남을 현재에 표현하는 것은 <첫> 만남의 현재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표현(re-presentation)이, 다시 (re-) 현재(present)로 만들기(-ation)라고 한다면 이 만남의 고유한 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re-)라는 접두어는 현재의 유일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까? 결국 몸의 감각을 ‘표현’하는 것은 <첫> 만남이었던 것을 “이미 현재이지 않은 지나간 기억”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은 아닐까?


<첫 > 만남의 고유한 현재성을 보존한 채로 표현을 가능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내 생각에 최인수 작가의 작업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작가가 작업을 하는 방식이 체험한 것을 경험으로 만드는 것( 어린 시절의 어떤 ‘순간’의 몸의 감각을 지나간 경험이나 추억으로서 해석함)이 아니라 ‘체험을 체험’하는 방식으로 ‘표현(ex-pression)’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체험의 체험이 가능할 수 있을까?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첫> 만남의 고유함이 보존되려면 과거의 것 ‘다시’ 불러와지는 것이 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언제나 늘 새로워야 한다. (처음은 새로움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첫> 만남의 기억을 떠올려 그 감촉을 생각할 때 과거의 ‘있었던’, ‘변화하지 않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와 마주침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감촉’이어야 한다. 작가의 손이 을 만지면서 그 질감 안에서 생성되는 흙의 감촉살갗<첫> 만남이 새롭게 태어나며  손의 살갗은 이렇게 새롭게 탄생한 감촉과 <첫> 만남을 가진다. 이 <첫>만남의 감촉은 흙의 본질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살갗과 흙 표면 사이, 살갗도 흙 표면도 아닌 어떤 자리(이 자리를 '장소'라고 말하는 것보다 '비-장소'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하고 있다.  이 때문에 흙의 물성은 감촉의 자리를 위해 어쩌면 비워져야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주철이 흙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감각만 오롯하게 보전하는 '비장소의 장소'를 만들어낸다.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자: 주철의 표면에서 탄생한 흙의 질감은 그 만남의 감촉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의 고유성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 만남)으로 보전된다. 그리고 이(() 만남)은 작가의 살갗과의  만남의 긴장(tention) (in-)에서 탄생한 것이므로 {(() 만남) () 만남}으로 처음을 온전한 채로 동시에 처음인 둘의 처음으로 보전 할 수 있다. 그리고 흙의 본질이 주철의 표면에서 비워지며 감촉의 장소만이 오롯하게 보전된다.{(() 만남) () 만남}, 이것이 체험의 체험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 할 수 있지 않을까?  체험의 체험에는 그 자체로는 해석이 불가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감각의 사유가 열려있다. 작가가 말하는 <감각의 시어>는 이 ‘체험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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