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느끼거나 우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나타나는’ 현상 속에 이러한 ‘세계 너머의 세계’가 내재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말해 우리의 인식의 모든 것이 결국 0에 수렴하는 특이점 너머의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 속에 있습니다.
2) 둘의 관계에서 ‘비어있는 것(들)’을 바라보기 위한 방법론
:사랑을 탐구하기
그러나 우리는 ‘블랙홀’을 직접적으로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이 이 ‘비어있는 것(들)’을 직접 보거나 탐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무한하게 소멸되는 지평’인 ‘사건의 지평선’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 ‘지평의 너머’의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지평이 삶과 역사 속에서 가장 밀접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예는 ‘사랑’의 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예전에 ‘오롯이와 오로지’의 차이를 분석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의 논지 속에서 저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 “사랑은 양적인 것도 질적인 것도 아닌 독특하고 유일한 관계를 명명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서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빈번히 발견되는 표현을 분석했습니다. 이 표현은 사랑의 이유를 묻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너라서’입니다. 이 말은 내 사랑의 이유는 ‘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 표현이 저는 굉장히 미스테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특성 혹은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고 ‘너’라는 사실만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의 목소리, 얼굴, 성격, 습관 등의 ‘너’를 지칭하는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면 나는 과연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은 이 대답은 전혀 대답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요? 여기서 사랑의 주어인 ‘나’는 ‘너’의 이러저러한 면이 좋아서 너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것처럼 이렇게 ‘너’를 좋아하는 특성조차 ‘사랑’에 이르는 관계의 고양 속에서 중요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즉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 “나는 너를 a라는 점이 좋아서 사랑하는 걸까?”— “아니야”. 그렇다면 b라는 점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야” 그럼 “c?”, “d?”…
여기에 적용할 수 있는 항이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답은 결국 ‘좋아하는 점’의 부정이 될 것입니다. ‘좋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좋아하는 것을 언제나 초과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부분만을 좋아하는 것인 반면 사랑은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이유에 대한 대답에 충분히 진지해지면 대답의 어떤 말도 그 이유에는 오답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받는 충격은 나는 ‘너의 존재’ 너의 있음 그 자체를 사랑하는데 ‘너’의 존재에 부여할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실은 ‘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 ‘너라서’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너’는 사랑을 하는 주어 ‘나’에 대해서 ‘비어있는 것(들)’이 됩니다.
그런데 이 분석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그 사람의 ‘어떠어떠함’을 통과해서 사랑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의미의 부정일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무한히 의미가 소멸하는 지평에서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의 지평선’에서 물체의 밀도가 무한해지듯이 의미의 부정을 야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미들이 무한히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미가 무한히 부정되기 위해서 의미는 무한히 생성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지평을 ‘의미의 ‘충만한 장소인 동시에 충만함을 넘어서기 위하여 그 충만함의 내용이 부정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무한 너머에 비로소 ‘비어있는 것(들)’으로 존재하고 ‘나’의 문법이 통하지 않는 세계 속에 ‘너’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