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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Sep 24. 2023

단어 10

: 정지

"무언가 멈춰있다." 이런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스냅사진과 같은 추억의 이미지. 고장 나서 멈춰 선 자전거. 담장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고양이. 누군가에게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어떤 사람. 생을 다한 몸.


정지의 이미지는 다른 여타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이미지에 투영하는 담론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그 의미를 달리한다. 그러나 이 이미지의 독특한 점은 '달리는 것', '둥둥 떠다니는 것', ' 먹는 것'과 같이  '방향 잡힌' 의미로 인하여 담론이 시작는 것이 아니라 주변세계의 담론으로부터 시작해서 움직임이 없는 상황에 의미를 투영한다는 것이다.


*위의 예시들은 정지에 투영되는 담론들을  '상황'과 사건, 의지'와 '무의지' 관계에 따라서 배열한 것이다.


시간 속의 순간

첫 번째로 '스냅사진과 같은 추억의 이미지'에서 정지는 시간 속의 사건이 아니다. 단지 발생 중에 있는 사건의 한 순간이고 그 순간이 이미지로서 펼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정지'는 사진 속 시간의 흐름이라는 담론에 개입되지 않는다. 서 말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이미지는 이 담론 속에서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간 속의 순간'으로서의 이미지는 '달리는 것(움직임)'에 '정지'의 담론을 부여하여 '달리지 않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진 속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는 초등학생은 '뛰고' 있고 사진 속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비행 중'이다.


기능의 결함으로서의 정지

두 번째 '고장 나서 멈춰 선 자전거'는 '기능의 정지'로  기능이라는 원활한 유동성에 제약이 걸린 상황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고장은 '할 수 있었던' 것을 '못하게' 되는 '상황'이다. 리말해 '가능성이 불가능해지는 기능적인 상황'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행위가 동인이 되는 '사건'은 아니다.


의지적 행위로써의 정지

'담장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고양이'는 가만히 있고 싶어 한다. 담장 위에 서있을 수도 있고 담장을 내려올 수도 있지만 자신의 원함에 따라서 가만히 있기를 택한다. 즉 여러 가능성 중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정지'라는 하나의 가능성을 택한다. 이 정지가 어떤 때에는 휴식과 같은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강한 의미의 '멈춤'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인으로는 학교를 가지 않는다던지 회사를 퇴사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지가 조직적으로 일어나는 대표적인 예는 파업을 말할 수 있다. 이는 투쟁적 형태로 나타나는데 파업 외에도 비폭력 저항운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3.1 운동.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마틴루터 킹 목사로 대표되는 평화주의자들의 조직적 비폭력 운동. 등등. 이와 반대로 정지는 폭력에 소극적 묵인 혹은 적극적 승인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타의적 행위로써의 정지

기능의 고장으로 나타난 정지가 가능성의 제약에 의한 정지를 나타내고 의지적 행위로써의 정지가 여러 가능성을 배제하고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라면 '누군가에게 붙잡힌 사람'은 가능성이 '기능의 결함'도 자신의 의지의 '배제''선택'도 아닌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임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것을 말한다. 

는 '기능의 결함'에서 고장이 '상황'으로 나타난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여기서는 의지에 의한 행위가 개입되어 나타나는 '정지의 사건'을 '당한 것'이다. 나의 의지와 반하여(malgré-la-conscience) 나타나는 정지는 레비나스가 말하듯 고통(souffrance)이다.  의지에 반하여 나타나는 타인의 고통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의 표지로서 정지가 나타나기도 한다.


비-의지적 사건/상황으로서의 정지

정지의 이미지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미스테리한 것이 '생을 다한 몸'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정의(; '상황'을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시간으로, '사건'을 '의지가 개입된 시간'으로 정의)에 반하여 '-의지'적 '사건'이라는 말을 투영해 이 '몸'의 이미지를 해석해 보자. '생을 다한 몸'은 신체적 기능이 멈춘 것이므로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의지가 개입된 담론이 부여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몸은 의지라고 할 수 있는 주체를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몸'은 무의식과 달리 표현해서 '비-의지적'이다. 정지의 동인 무의식적인 것조차 될 수 없다.

러나 왜 '사건'인가? '생을 다한 몸'은 의지의 총체로서의 삶의 부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부재는 그 '삶이 있었음 Il y avait une vie'을 증명한다. 따라서 생을 다한 몸은 그 자체로 '사건'의 담긴밀하게 연결되는데 사건의 종결로서 그러하다. 그러나 온전한 의미에서 '사건'이 될 수는 없는데 '이미'사건은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엄밀한 의미에서 '생을 다한 몸'은 사건의 유물 즉 '사건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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