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동안 가장 가까이하는 게 펜이다. 매일 가지고 다니는 노트에 책을 보면서 옮겨 적기도 하고 생각나는 걸 그냥 쓰기도 한다. 만년필 세 자루를 항상 들고 다닌다. 하나는 보기에 예쁘고 글씨가 동글동글하고 부드럽게 써진다. 또 하나는 누가 선물해 준 펜이다. 펜 촉이 날카로워서 글을 쓸 때 차가운 느낌이 든다. 마지막으로 다른 하나는 펜 촉이 납작해서 고딕체를 쓸 때 주로 쓴다.
예전에는 만년필이 아니라 볼펜을 썼다. 그때는 연필이나 볼펜 밖에 몰랐다. 그런데 볼펜이나 연필은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면서 글을 쓰는데 이럴 때면 손이나 펜의 불편함에 대한 생각이 글을 쓰는데 방해가 되었다. 만년필은 손에 힘이 덜 들어가서 이런 강박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글을 쓰는 도구에 따라서 생각의 방향과 톤이 달라지는 사실이 재밌다. 지금 쓰는 펜들을 말해보자면 첫 번째 펜은 가장 좋아하는 펜인데 화려하지 않고 모양과 색이 차분해서 마음에 안정을 준다. 글을 쓸 때도 종이를 긁는 느낌보다 부드럽게 닿는 느낌이어서 글씨체도 이 만년필을 쓸 때는 곡선이 많이 들어간다. 약간 신경안정제 같이 글을 쓸 때 조금 힘이 풀어져서 글이 좀 더 자유롭고 깊이 들어갈 수 있게 해 준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글을 쓸 때 적합해서 보통은 이 펜을 주로 사용한다.
자주 쓰지는 않지만 직관적이거나 조금은 강박적인 생각이 필요할 때는 두 번째 펜을 쓴다. 펜 촉이 날카로워서 종이를 사각사각 긁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도 펜을 움직이는 데는 칼날이 빙판에 미끄러지듯이 나간다. 내 생각보다도 펜이 미끄러지는 속도가 빨라서 생각을 재촉하게 한다. 단편적인 생각과 논리보다는 직관을 우선으로 하고 싶을 때 적합하다. 가끔 이렇게 쓴 걸 보면 뭔가 중요한 걸 쓰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세 번째 펜은 고딕체 전용이다. 고딕체로 글 쓰는 걸 좋아하는데 이유는 그냥 멋있어서다. 원래 악필이었어서 고딕체의 정연함이 더 끌리는 것 같기도 하다. 제목이나 짧은 문구를 쓸 때 고딕체를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펜 자체를 많이 쓰는 편은 아니다. 필기를 할 때 써보기도 했는데 납작한 펜촉 자체는 글을 막 써도 정리가 되어 보이게 해서 글을 쓰고 난 다음에 보기에는 좋다. 문제는 글을 쓰고 있을 때 힘이 조금 들어가기도 하고 써지는 느낌에서 약간씩 미묘하게 거슬리는 게 있어서 잘 안 쓰게 된다. 나중에 좋은 펜을 만나면 좋겠지만 아직까지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