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12 (1)
: <영원회귀> 혹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영원회귀(Ewig wiederkehren)' 또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 모든 것이 동일하게 회귀한다는 니체의 사상은 자신의 정체성(identité; 동일성)을 묻는 자에게는 희소식일지 모른다. 동일한 것의 영원이 회귀한다는 사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증하기에 더할 나위 없으니까.
영원회귀는 얼마 전에 삶을 다한 밀란 쿤데라의 인생을 영원히 반복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주인공 토마시가 반복해서 외쳤던 'enimal ist keinmal(직역하면 '한 번은 한 번조차 아니다' 혹은 '한 번뿐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이라는 독일 속담은 뒤집히고 모든것은 확실성 속에 붙잡힐 것이다. 한 번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모든 '한 번'의 행위들은 나의 영원한 정체성의 확인이자 증거가 된다.
한 번이 영원히 회귀한다는 것은 영원한 확실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쿤데라의 책에서 처럼 그리스도는 영원히 십자가에 매달려야만 하는 의미의 무게를 지어야 할 것이고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혁명의 유일성을 잃고 참을 수 없는 무의미의 가벼움을 견뎌야 할 것이다. 니체가 이 영원회귀를 고안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에 지옥을 안겨주고자 했음을 알고 있다. 니체를 망치를 든 사상가라고 했을 때 니체가 부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삶과 의지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모든 것이었음을 안다.
그리스도교의 사상에서 영원 회귀는 지옥과 같다. 지복(béatitude)은 내세(outre monde; 세계 너머)에 있고 이 땅(ici-bas)의 행복은 세계 바깥에서 도래하니 말이다. 세계 바깥을 제거하는 사고실험은 삶에 고통만을 남긴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통찰은 불교에서도 발견된다.
(내 짧은 이해로) 불교에서의 통찰은 이와 같기 때문이다. 삶은 윤회한다. 삶은 인과(因果)의 지배를 받는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인과로 인해 삶은 고통을 받는다. 더 나아가 윤회론은 하나의 삶 안에서도 해석될 수 있다. 지금 순간의 나와 다음 순간의 나, 이미 자신의 순간을 맞이한 지금은 이전 순간의 나를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다. 이전 순간의 삶은 나를 종속시키고 또 다음 순간을 종속시킨다.
시간 속에 스러져간 나는 인(因)이 된다. 그리고 지금 시간에 내던져진 인(因)의 과(果)로서 존재하는 나를 지배한다. 어떤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한 채 과거와 현재의 인과의 연쇄 속에 떠밀려 불안 속에서 겨를 없이 선택한다. 불교의 귀결은 이 인과를 끊는 것 "나"의 연쇄를 끊어내고 "무아(實我)"임을 아는 것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 고통(苦)은 나라는 아집(集)에 원인이 있으니 이를 멸(滅)하여 도(道)에 이르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나는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삶 혹은 인과로서의 시간이 나에게 짐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짐을 질 수 있는 나라는 실체는 사실 없기 때문이다.
다시 니체의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로 돌아와 보자. 영원회귀의 사상은 불교의 무아(實我)를 요청하지 않는다.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무한한 회귀이고 한 번을 참을 수 없는 무거움으로 변모시킨다. 어떤 존재도 이 의미의 무거움 앞에서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다. 무아(實我), 즉 자신의 비존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치' 없는 것('comme si' je ne suis pas)과 같은 가벼움과 마주하는 것이다. 니체는 불교에서와 같이 고통을 제거하지 않았다. 무아는 고통받을 실체를 제거하지만 영원회귀의 주체는 자신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sa légerté insoutenable)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없는 것과 같은 '나'는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레비나스의 고통의 정의 즉 malgré-la-conscience(;의지에 반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는 한 번의 행위 속에 영원히 갇힌다. 다시 말해 의지의 모든 자유는 영원한 반복 속에서 한번 einmal의 동작 안에 갇힌다. 의지는 마치 없는 것과 같이 영원한 동일성을 감내한다. 그러므로 니체의 영원회귀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삶의 의지에게도 비극을 가져온 것이다. 니체는 고통의 제거가 아니라 고통자체를 원했다. 삶이 고통이라면 고통으로서의 삶을 사랑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여기에 니체의 증오와 분노에 대한 나의 연민이 있다).
그렇다면 이 동일성의 감옥 속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영원회귀의 귀결에서 남는 것은 '내가 '마치' 없는 것과 같은 것(comme si je ne suis pas)'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영원회귀에서 삶의 의지를 받아들일 비좁은 문은 고통의 통로인 지각 자체의 영역이다. 그래서 이 영역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