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고통
체호프의 단편 <6호 병동>에서 나타나는 중심 명제는 다음과 같다.
: «이성적 사유는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
이 소설에서 우리는 두 인물의 두 가지 입장 즉 이성과 고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명은 안드레이 에피미치라는 의사이고 다른 한 명은 이반 드미뜨리치는 정신병동인 <6호 병동>의 환자이다. 이 병동은 말이 병동이지 광인이라 판단된 사람을 가두는 감옥과 다름이 없다. 관리자 이외에는 병원에서 이 병동을 돌보는 일이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이 <6호 병동>에 무관심하던 에피미치는 이 병동의 드미뜨리치라는 환자를 만나게 되고 지성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음에 희열을 느낀다.
«당신은 사상이 있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군요. 어떤 환경에서라도 당신은 자신 속에서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에피미치는 스토아학파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의지를 가지고 관념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 관념을 버려라. 불평을 그쳐라 그러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서 «따뜻하고 아늑한 서재와 이 병동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사람의 평화와 만족은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오니까요?»라고 덧붙인다.
에피미치에게 고통은 스토아학파에서처럼 하나의 관념, 즉 이성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더 풀어말하자면 <고통>은 우리의 신체가 수용한 자극에 대한 관념적 판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외부 자극에 대한 이러한 판단을 지성적인 의지로 바꿀 수 있음을 역설한다. 따라서 이러한 논지로 <따뜻하고 아늑한 서재>와 <병동>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병동에서 느끼는 <고통>, <비열함>, <혐오>등은 하나의 관념으로서 제거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서재에서 느끼는 <따뜻함>, <편안함>과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에피미치의 입장에서 궁극적 즐거움은 사유할 수 있음의 힘에 있는 것이지 관념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통>, <비열함>, <혐오>, <따뜻함>, <편안함>은 진정으로 사유할 수 있는 자들이 지성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동일한 관념들일뿐이다.
그러나 드미뜨리치는 화가 난 듯 찡그리며 말한다. «이성적인 이해… 외부의 것, 내부의 것…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내가 아는 것은 (…) 신이 나를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소! 유기적인 조직체는 죽지 않았다면 모든 자극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반응하고 있는 겁니다! 고통에 대해 나는 비명과 눈물로 대답합니다. 비열함에 대해서는 분노로,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구역질로 대답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바로 삶이라 불리는 겁니다».
드미뜨리치는 «고통»에 대해서는 «비명»과 «눈물»로 «비열함»에 대해서는 «분노»로 «혐오»에 대해서는 «구역질»로 답한다고 말하며 이것을 «삶»이라고 답한다. 이 답변은 초반의 혼란 («이성적인 것… 내부의 것… 외부의 것…»), 즉 이성적 사유와 고통 중 어떤 것이 <외부의 것>이며 <내부의 것>인지에 대한 에피미치의 전제를 전복하는 것이다. 나타나는 감각에 대한 응답이 «삶»일 때, 이 응답은 외부적인 것이 것이 아닌 삶에 내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드미뜨리치가 이 응답으로서 제시한 것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명», «눈물», «분노», «혐오», «구역질»이라는 반응은 모두 어떠한 주체의
의지가 <어찌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것들이다. 즉 지성의 주체적 힘이 제어가능한 판단이 아니라 이성을 벗어난 것에 대한 반응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 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고통>을 다른 여타의 감각, 즉 색, 소리와 접촉의 체험처럼 의식 안에서 발견되는 <심리적 내용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통>은 의식 안에서 «의식에 반한 것; malgré la conscience»를 내용으로 가진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성찰에 의지하여 볼 때, 고통은 의식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의식에 반한 것», 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이렇게 이름 안에 있을 때, 고통은 통제되고 억압될 수 있다. 19세기말 당시의 시대에 통제되지 않는 인물들을 비정상, 광인이라 규정하고 <6호실>에 감금한 것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광인은 사회의 의지가 감당하기를 거부하는 과잉의 인물이다.
고통은 다시 레비나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에피미치의 말과 같이 의지가 본질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수 없는 것»,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감성, 오성의 척도로 환원될 수 없는 <너무>감각적인 것(; trop sensible)이다. 이에 우리의 의식과 신체는 어찌할 수 없는 분출로, <비명>,<눈물>,<분노>,<구역질>로 답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드미뜨리치는 바로 이 고통의 목소리가 육화 된 것이며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는 이 <6호실>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의식적 사회적 시스템이다.
따라서 의사인 에피미치가 이 6호실 안으로 들어가는 사건, 그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사건은 위험한 것이다. 그를 통해 6호실의 억압된 «책임질 수 없음», «감당할 수 없음», 감성과 오성에 «반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에서 위험으로 판단된다. 레비나스를 다시 인용해 보자.
«“감당할 수 없음", 그것은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그것에 대한 파악과 유지의 수단들의 척도를 넘어서는 과도한 긴장에서, 양적인 "과잉"에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내용 그 자체 안에 기입된 위반, "과잉"은 고통으로서 서로에 대해 열리고 서로 다른 것에 접목하는 듯이 보이는 감각의 영역들을 변형한다. (…) 하나의 질서로 모으고, 하나의 의미로 끌어안을 수 있는 칸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에서, 고통의 현상이 종합을 방해하는 하나의 소여일뿐만 아니라, 소여 전체를 의미있는 것으로 모으는 것에 반대되는, 그러한 종합에 대립되는 거부의 방식 그 자체인 것처럼 일어난다; 질서를 방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방해 그 자체. » (레비나스, 우리사이; Entre nous, p. 100-101)
<6호 병동>에서 에피미치는 <사유할 수 있는 인물>로서 등장한다. 병동을 지키는 관리인과 달리 에피미치가 위험한 것은 이 <사유할 수 있음>의 가능성이다. 관리인은 억압과 통제의 무시무시한 양심만을 가지고 있을 뿐 진정으로 숙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피미치가 환자인 드미뜨리치를 사유하는 것은 의식이 의식에 <반하는 것>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같으며, 레비나스가 « "과잉"은 고통으로서 서로에 대해 열리고 서로 다른 것에 접목하는 듯이 보이는 감각의 영역들을 변형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상적»,«보통», «상식적»이라 불리는 관념들에게 재정의를 요구한다. 안정된 질서는 혼란해지며 보통의 <인간>이라는 <하나>의 질서는 무너진다. 더 근본적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가 확고한 기반으로 여기는 제1 실체로서의,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라는 <하나>의 기반은 위협받는다.
소설에서 에피미치가 <6호 병동>을 찾아가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기이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곧 에피미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고 결국 그는 의사직을 그만두어야 하게 되었다. 심지어 주변 인물들은 그를 <6호 병동>에 넣어버린다.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