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업의 디자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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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전 글에서 무비랜드의 큐레이션에 관한 아쉬움을 털어놓았는데, 그건 재미 삼아 기획의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본 거였고 진짜 얘기하고 싶었던 건 따로 있다.
'무비'라는 말이 가진 이미지가 강해서 무비랜드를 극장 혹은 영화관으로 자꾸 보고 판단하게 되는데, - 이게 틀렸다는 건 아니다 - 이 공간은 말 그대로 모베러웍스의 '랜드'이다. 모베러웍스가 마련한 땅, 구현하는 자리, 상상이 실현된 공간.
즉, 모베러웍스의 (또 다른) 디자인 산출물. 모베러웍스는 디자인장이들이고, 그들은 늘 어떻게든 디자인을 한다. 이번에는 그 목표가 극장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했고 그런 관점에서 결과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 무비랜드를 가보지는 않았지만,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가게 될 것이고 그때도 중점적으로 보고 싶은 부분은 영화보다는 어떤 디자인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모티비의 서사와 무비랜드라는 결과물을 연결 지어서 모베러웍스의 디자인, 아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춘의 디자인에 관해 얘기하게 될 것 같다.
2.
무비랜드의 공간을 살펴보면 통일된 아이덴티티 안에서 그 이전의 작업과 다르게 수작업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극장의 간판부터 입구 앞 작은 스툴, 대기실 조형물, 액자 속 입면도, 티켓, 영화 포스터, 티셔츠 나염, 영화 시작 전 안내 영상 등 다양하고 자잘한 요소에 고루 적용한 걸 알 수 있다. 물론, 워낙 디자인을 잘하는 팀이기에 각 요소와 전체 그림의 상관관계를 짜는 일이나 밸런스를 맞추는 일에는 도가 트였고, 전에도 간간이 브랜딩의 극대화를 위해 수작업을 포함하긴 했지만 이번처럼 본격적으로 수작업을 전체 그림의 골조로 삼은 일은 없었다.
모베러웍스로 활동하던 시기를 시즌1이라고 본다면 무비랜드부터는 시즌2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생기는데, 그 가운데 수작업이라는 키워드는 상당히 중요하게 자리 잡는다. 먼저 이 수작업이라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티비를 정주행 한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를 테지만, 무비랜드는 파트1과 파트2가 있다. (모티비는 같은 파트의 썸네일에 같은 배경색을 쓰기 때문에 이 구분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구분점이 우리가 수작업에 관해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깝고 명확한 지표이다. 두 구분점 사이에는 23년 노동절 행사가 있고, 이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바뀌게 되는데, 그 표면적인 틀로 변한 것은
극장 네이밍 이슈
프로젝트의 이름이 모베러웍스 픽쳐스에서 무비랜드로 바뀌었을 때, 기획은 다시 처음부터 출발한다.
모춘은 결국 무비랜드라는 말이 짜쳐서 맘에 들었던 것 같다. 어떤 조악함, 어떤 진부함, 어떤 투박함. 어떤 기시감. 그러니까, 무비랜드라는 단어가 저 형편없는 나무 판때기 위에 있을 때, 모춘은 어떤 느낌을 받은 거 같다. (그리고 난 그런 모춘의 촉이 모베러웍스 성공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지점은 저 피켓을 들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노동절 행사에 있다. 결과적으로는 24년 2월에 오픈하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9월 오픈을 염두에 두고 한창 작업을 하고 있었고 5월에 팬들을 대상으로 (나중에 오픈하면 올) 100명을 초대해서 극장의 성공을 염원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9월 오픈이 연간 기획에서 가장 큰 이벤트였기에 5월 노동절 행사에 많은 리소스를 투입할 수 없었고 때문에 이런 무드를 중심으로 행사를 기획하게 된다.
학예회스럽게 진행할 거라는 것이 이미 내부적으로는 합의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처음엔 부족한 자본에서 시작했을 수 있다. 행사를 하긴 해야 하는데, 점 찍고 가긴 해야 하는데, 너무 약소하게 할 수는 없고, 분위기는 내고 싶고, 극장의 축소판을 사무실에 구현하자. 그렇게 사무실에 나무를 잔뜩 가져다 놓고 어설픈 구조물을 세우고, 판자를 잔뜩 만들어서 그 위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천을 잘라다가 박음질을 하고. 그런데 노동절을 마치고 리뷰하는 과정에서 수작업이 디자인 방향성의 중심에 확 들어온다.
여기서 수작업에 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모베러웍스의 지향점, 혹은 모춘의 지향점에 있는 수작업은 정확히 디자인 경제학의 반대편에 있다. 디자인을 고도화하고, 완성도를 높이고, 오차 범위를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과정, 그렇게 해서 생산성을 높이는 과정의 반대편. 신체의 개입으로 발생하는 오차를 받아들이고 개체 간의 차이를 용인하는 것, 비효율적인 과정을 반복하는 것, 불필요한 비용 지출을 감수하는 것, 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을 전달하는 것.
흥미로운 점은 이 수작업에 관한 내용이 무비랜드 기획 초창기에도 나온다는 점이다. 정말 처음에 아무것도 없이 조금씩 극장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떠듬떠듬 나아갈 때, 소호와 모춘과 훈택은 종로의 에무 시네마와 톰 삭스 전시를 다녀온다. 그러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 가는 길에 톰 삭스 전시를 돌이켜보면서 방향성에 관한 단서를 얻는다.
이 말은 정확히 23년 노동절에 실현된다.
톰 삭스의 작업에 관해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자신의 작업을 애플과 비교하며 완벽하지 않은 요소, 완전하지 않은 요소의 가치에 대해 역설한다. 수작업이라는 요소는 비효율, 오차, 불량이라는 요소를 가져오고 조형적 완성도에 손상을 주지만, 반대로 작업한 사람을 드러낸다.
'사람을 드러내는 디자인'이라는 건 모춘에게 중요한 테마 같다. 책발전소의 큐레이터로 선정되었을 때, 모춘은 이런 말을 한다.
이 말은 모춘이 가진 통찰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디자인이라는 분야는 상업과 긴밀하게 붙어있어서 작업자를 드러내기보다 항상 상품과 서비스 뒤에 가려지게 된다. 디자이너의 고유한 생각이나 습관, 태도가 작업물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건 시장의 논리 안에서 허용될 때 나갈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여 그 사람의 흔적을 지워낼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량 생산품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긴 힘들 것이다.
모춘이 라인이라는 대기업에서 나왔던 건 그런 맥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 그리고 디자인하는 게 재밌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지워가며 그림을 그리고 자본을 따라 디자인해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전달되는 것이 없다는 게 힘 빠지게 했을 것이다.
조금 더 흥미로운 건 퇴사하고 나와서 처음 한 일이 모베러웍스를 한 게 아니라 (이것저것 했지만) 리소 프린트를 활용해서 장사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리소 프린트는 고유의 방식을 쓰는 구식 프린터기인데, 색별로 다른 카트리지를 활용하기 때문에 복잡한 디자인을 인쇄한다면 상당히 번거롭고 잔고장이 많은 프린터기이다. 때문에, 핀이 나가고 색 번짐이 있고, 여러 흠이 있는데, 모춘은 그 자체를 사람의 흔적으로 받아들이고 작업에 활용한다. (인쇄술의 역사와 디자인의 역사가 어느 정도 겹쳐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인상적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베러웍스가 과정을 모티비를 통해 공유하고, 퇴사자의 상황을 서사적으로 활용했던 것은 공산품 안에 모춘이라는 사람을 넣기 위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래픽이 아메리칸 빈티지적인 것도 모춘의 과거 혹은 취향과 깊이 연결된 문제로 본다면, 더더욱 사람의 흔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한풀이하듯 모베러웍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하고 싶은 그림을 그렸을 때, 사람들이 공감해 주고 반응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디자이너 관성에 따라 시장의 논리에 따라 디자인을 하게 된다. 밥벌이를 위해서든, 팬을 위해서든, 더 많은 관심을 위해서든.
이런 지루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떠올린 게 무비랜드인데, 그런 측면에서 수작업이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은 필연적인 결과처럼 보인다. 여기서 수작업은 실력을 갈고닦아서 오차 범위를 줄이고 퀄리티를 올리는 장인 정신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앤디 워홀의 세계관 안에 바스키아가 들어오는 것에 가깝다. 똑같이 복제되는 이미지 안으로 훅 들어온 낙서. 그 어설픈 선이 주는 사람 냄새.
3.
그렇다고 해서, 무비랜드가 23년 노동절의 다른 버전은 아니다. 조악하다고 하기엔 완성도가 높고, 공들인 정도가 상당하다. 같이 협업한 작가들은 심지어 장인에 가깝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무비랜드는 수작업을 다시 한번 더 디자인한 공간이다. (여기서 디자인한다는 건 일종의 세련화 과정이다.) 조악함을 디자인하고, 오차를 계산하고, 엉성하게끔 보이도록 수정을 거듭한다. 그렇게 두 번 이상 꼬아서 기존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비튼다. 모든 수식 끝에 -1을 해서 내놓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천상 디자이너고, 디자인론 안에서 새로운 방식을 모색 중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매달 한 사람을 조명해서 소개한다는 큐레이션 방식은 기획적으로는 일관성이 있는 것 같다.)
동시에 이런 방법론이 시장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다른 글에 따로 쓰게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레디-메이드 안으로 들어오는 핸드메이드라는 아이디어는 시장 안에서 어느 정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고, 조금씩 그 영역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장사 내지는 사업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소비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가야 하는데, 그 와중에 디자이너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과 충돌할 수도 있기에, 어떤 방식으로 접점을 만들어갈지 궁금하다. 수작업이라는 아이디어는 또 어떻게 변주되고 변화하고 활용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