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 본 적 없는 삶을 살아야 할 때

억울함을 버티는 힘에 대하여

by 휴지기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어.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말이야.


엄마가 처음 이 글을 시작한 건, 그래도 너보다 한 세대를 더 살아온 사람으로서 너에게 해줄 조언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어. 으음.... 가난한 엄마라서, 엄마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고, 그래서 글로나마 네가 힘들 때, 방향을 잃었을 때 도움을 주고 싶었거든.


근데 있잖아, 글을 쓰다가 깨달았어. 너에게 뭔가를 조언해 주기에는 엄마는 너무 아는 게 없다는 걸 말이야.


엄마도 지금 거칠게 흔들리고 있는 중이라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엄마도 모르겠더라. 순간순간에는 최선을 다한다고는 살아오기는 했는데 그게 정말 최선이었는지, 아니면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해 놓고 그게 최선이었다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한 건지 알 수 없겠더라구.


내가 잘 살아왔으니 너도 이렇게 살아라라고 하기에는 엄마의 지금 삶이 너무 위태롭고, 나는 잘 살아오지 못했으니 너는 나처럼은 살지 말라고 하기에는 엄마의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 허무해지는 것 같고.


엄마는 진짜 잘 모르겠어서, 그래서 엄마는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더라구.


엄마는, 마흔이 넘은 엄마의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뿌리까지 흔들리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 엄마의 세상에서는 성실히 일하면 대가를 받았으니까. 엄마가 알던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성실히 일하고도 대가가 없는 세상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어.


근데 살아보니까 세상에는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참신하고도 다양한 불운과 불행들, 사건과 사고들이 존재하더라. 그리고 어쩌다 보니, 원치 않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중심에 엄마가 서 있기도 하더라.


절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너도 살다 보면 네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어. 네가 일으키지 않은 폭풍우들이 너를 덮칠 수도 있어.


그때 네가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아마 억울함일 거야. 엄마도 그랬거든.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내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지? 이런 생각을 아주 많이 했거든. 아니, 과거형이 아니다. 엄마는 지금 그런 생각의 한가운데 있어.


그때 네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그냥 살고 있어. 그냥, 하루하루 출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그렇게 그냥 살고 있어.


물론 발밑에 있는 폭탄이 지금 심지가 거의 타들어가고 있지만 어느 순간 빵, 하고 엄마의 일상을 산산조각낼 수도 있지만 엄마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냥 살고 있어.


너에게는 억울한 일이, 좌절이나 절망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지만 인생은 참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그래서 엄마가 지금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만 너에게 밥을 꼬박꼬박 챙겨주고 오글거린다고 싫어하는 너에게 지속적으로 예쁘다, 귀엽다 애정표현을 해주는 일. 그래서 네가 그 억울함과 좌절과 절망을 버텨내는 힘을 길러주는 일.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


엄마가 아들에게 주는 편지는 그래서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아. 엄마가 너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기에는 엄마가 너무 부족하고 불안정해.


너를 가난하게, 외롭게 키우고 있어서 너무 미안하지만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엄마는 너를 끝내주게 사랑해. 내가 너에게 주는 사랑의 힘으로 인생의 터널들을 무사히 지나가기를, 소망한다, 아들아.


나의 귀하디 귀한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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