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다 읽다가 또 읽고 싶어서 사고, 그 책 읽다가 그 작가가 궁금해서 사고, 딸들이 추천해 주는 책도 많이 샀다. 지금은 전자책으로 많이 읽게 되지만 그래도 아날로그시대에 자란 나는 책을 갖는 것을 즐긴다. 어릴 때 외삼촌댁에 있던 한국 단편 소설을 일주일에 두어 권씩 빌려다 읽었다. 그러다 중 고등학교에 가서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만날 수 있었고, 다른 친구들보다 책을 찾아다니는 데는 조금 빨랐다. 하지만 내 책을 갖기에는 사는 일이 그리 녹녹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열린 글방에서 삼백 원 이백 원씩 주며 빌려 읽은 책. 도서관이 있었던 곳으로 이사 와서 딸들과 나는 환호성을 질렀었다.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읽던 나와 딸들. 그러던 어느 날. 큰 딸애가 갖고 싶은 책이 있다고 했다. 전집이었는데 몇 번에 걸쳐 허탕을 치고 속이 상했던 거 같았다. 아마 그때쯤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감히 서재를 만들 여건도 되지 않았던 젊은 날의 허기를 늘어나는 책장만으로도 엄청 행복해했다. 서재에서 빠진 딸들의 책이 있었던 자리를 내 책으로 채워지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 가. 졌. 다.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책장정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리하려는 내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아서 멍하니 바라만 보던 시간. 결정했어. 엄마의 입원과 함께 돌아올 수 없었던 선고에 가까운 3년여를 지켜만 보며 슬펐던 경험이 답이 되었다. 결국 떠나시고 나서야 거의 모든 것이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슬프지 않고 버려질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책뿐이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보게 된다.
마음의 도랑 물길이 바뀐다. 두 번 이상 읽은 것부터?. 일단 계간지부터 빼내고, 싸인본은 챙기고 어찌어찌 옮기고, 빼고, 챙기고, 얻어걸린 옛 추억에 먼지 속에서 주저앉아 마주 보며 우리는 킬킬거리고. "문지냐? 창비냐?" 시집 칸을 정리하던 남편의 물음에 나는 " 문지." " 나도 문지 일 것 같았는데 창비가 만만치 않아. 아마 애들이 산 것이 더 많은 가 봐." 그랬구나. 우리는 민음사 시집을 많이 샀고 애들과 함께 문학과 지성사의 시집을 골랐었는데. 애들은 창비의 시집을 많이 읽었구나. 정리가 얼추 끝났을 때 책장의 열세 칸이 시집으로 채워져 있었다. 정리가 끝냈다. 주말을 통틀어 한 노동의 대가는 너덜거리는 피곤만은 아니었다. 단지 서재 정리를 했을 뿐인데 오히려 더 채워지는 또하나의 세계를 설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