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랭
며칠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노래가 있다.
자리에 누우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그 따뜻함이 되려 시리고 슬퍼서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린다.
노래를 따라가다 보면, 알래스카의 설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알래스카의 끝없는 설원.
어디를 보아도 흰 빛만 가득할 뿐 밤과 낮도 가늠하기 힘들다.
저 멀리 환영처럼, 설원 위에 한 사람이 맨발로 걸어가고 있다.
다가가 보면 하얀 성의(聖衣)를 입은 그 혹은 그녀는 흰 입김을 피어 올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머리에도 흰 천을 둘러 그 혹은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힘겨운 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그 혹은 그녀는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다.
마치 늑대개의 하울링처럼 소리는 길게, 멀리 퍼져나간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하울링이 멈추자 눈밭 위로 그 혹은 그녀가 풀썩 쓰러진다.
순간, 얼어붙은 공기가 쨍하고 갈라지고, 그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갑자기 쏟아져 내린다.
흰 눈 위로 하얀 성의 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린다.
펄럭이던 옷자락이 알래스카의 찬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는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없다.
노래는 '할렐루야'. 나는 이토록 슬픈 고해성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걸까?
둥글고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는 덤덤하게 길고 긴 서사를 읽어나가는 듯하다.
그러다가 무의식 저 밑에 꽁꽁 묻어두었던 절망을 끌어올리듯 몸을 웅크려 소리를 끌어낸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25년 전쯤이었을까? 영화 프로그램에서 처음 그녀를 본 것이.
영화의 배경은 알래스카였고, 에스키모 원주민이 주인공이었다.
당시만 해도 알래스카와 에스키모라는 신선한 소재가 낯설어 눈여겨 보다 그녀를 보고 말았다.
아니, 그녀의 노래를 듣고 말았다.
미간의 주름이 선명한, 검은색 짧은 머리카락, 짙은 눈썹, 그리고 깊은 검은 눈동자. 꼭 다문 입.
그녀, k.d. 랭.
그녀가 주연했던 영화 '연어알'의 주제곡 'barefoot'
('연어알'의 감독은 '바그다드 카페'의 감독, 퍼시 애들론이다.)
'The wind through my soul blows cold'
노래 가사처럼 노래를 듣는 내내 찬 바람이 내 영혼 속으로 불어왔다.
한 동안 그 노래를 내내 듣고 다녔었다.
노래의 시작, 피아노가 연주하는 다섯 음은 내게 늘 이렇게 물어왔다.
'너는 괜찮아?'
시간이 흘러 잊고 있었다.
얼마 전, 예전에 듣던 음악을 찾다가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의 노래를 찾다 우연히 발견한 노래가 요즘 하루 종일 내 귀에서 맴도는 '할렐루야'다.
첫 소절을 듣고 숨이 막히고, 눈이 감겼다.
'Now, I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 <나는 어딘가에 비밀스러운 화음이 있다고 들었어요.>
노래는 다윗과 바셋바를 지나, 삼손의 이야기로 서사를 이어간다.
노랫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노래가 무엇을 풀어내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상징을 품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다.
그녀의 노래는 늘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그녀는 늘 내게 물어온다.
"너는 괜찮니? 아니, 그만하면 괜찮아도 되잖아?"
나는 그녀의 노래 앞에서 무너져 아이처럼 울고 만다.
그녀의 위로가 따뜻하고 포근해서 만이 아니다.
그녀의 질문에 이미 그녀의 답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괜찮아. 아니, 그만하면 괜찮아도 돼."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있잖아, 흐르는 물은 투덜대지 않아.
그저 흐를 뿐이지.
흐르지 않으면 썩어버리고 말 것을 아니까.
그냥 흘러가는 거야.
흘러가다 보면 씨앗을 만나 꽃을 피울 수도 있고,
흘러가다 보면 코끼리를 만나 목욕을 시켜 줄 수도 있고,
흘러가다 보면 메마른 사막의 지친 여행객의 목을 축여줄 수도 있고,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어느 순간, 멈추는 때가 오겠지.
시린 새벽, 고요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볼 수도 있겠지.
그러니 그저 묵묵히 흘러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는 수긍하고, 인정한다.
그래, 마른 사막을 흘러도,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져도.
모양이 바뀌어 비가 되어도, 눈이 되어도, 이슬이 되어도, 때로 눈물이 되어도.
결국 물은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2010년 밴쿠버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개막식, 단상에 선 그녀가 이 노래를 불렀다.
날카로운 미소년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이제는 둥글둥글 나잇살이 붙은 노년의 그녀.
그녀가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보를 걸어왔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녀는 솔직한 사람이며, 약한 존재들에게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왔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위안을 주기에 완벽하도록 충분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겨울을 성큼 몰고 왔다.
나는 이 겨울이 설렌다.
겨우내 한 번쯤 눈이 오겠지.
그러면 차가운 베란다에 나가서 내리는 눈을 보며 이어폰을 끼고 이 노래를 들을 것이다.
혹시 한 번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릴지도 모르겠다.
내 노랫소리는 지상으로 떨어지는 눈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