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by 마음자리



그러니까, 우리집이 가난하다는 걸 처음 피부로 느꼈던 것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내가 몸담았던 고등학교는 중학교 시절 전교에서 내로라 하는 아이들이 앞다투어 지원한 곳으로, 집안 형편이 변변치 않은 아이들은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들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3년 내내 암울했는데,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마음에 진 그늘은 대개는 부모님의 불화와 입시 스트레스, 그리고 경제적 결핍에 기인했다. 명문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일념(혹은 집착)은 신물 나는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말을 제외하고 전교생이 기숙 생활을 하는 학교였기에 매주 금요일 저녁이 되면 학부모들은 앞다투어 차를 이끌고 자녀를 데리러 왔는데 낡고 흉물스러운 차에 오르는 내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아이들이 떠난 늦저녁에 아버지를 부르곤 했던 기억이 내게는 아프게 남아있다.


해외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결정되었을 때 아이들은 저마다 친구들과 해외에 나간다는 설렘으로 떠들썩했지만 수학여행 비용과 용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하는 고민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던 기억도 있다. 감사히도 친척들과 부모님 지인들의 도움으로 필요한 돈은 금방 마련했지만, 화려한 해외 경험을 자랑하는 아이들 속에서 비행기를 타는 것도, 해외에 나가는 것도 처음이었던 나는 이유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다. 머리가 조금은 큰 지금, 그 때의 어린 나에게 다정히 말해주고 싶다. 그 누구도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부끄러움을 느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공부에 대한 강박에 관하여도, 가히 가난은 채찍과도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명문대학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 있었다. 어렸던 내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명문대학에 진학하여 남부럽지 않은 직장을 갖는 것이었으니까. 딱하게도, 갈수록 사는게 팍팍해져 그렇게나 염원했던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목표로 했던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지금의 나에게도 생활과 노후 대비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것이 현실이다. 월별 지출액이 매달 정해진 예산을 초과할 때, 불쾌한 조급함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겨우내 춥고 조악한 집에서 전기 매트에 의지해 동생과 부둥켜 안고 자던 기억도, 번듯한 대단지 아파트 앞을 지나면서 부러움이 한데 섞인 시기심을 느꼈던 기억도, 할머니댁에 얼마나 용돈을 부칠건지에 대한 부모님의 얘기가 불똥 튀는 싸움으로 번졌던 기억도, 마음 저변에는 깊고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러니 여전히 나는 가난에 취약하다. 마땅히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아픈 기억을 스스럼 없이 이야기하며 위로 받곤 하지만, 어렵게 자란 것이 행여 밖에 샐까 하여 언행을 조심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런고 하면 마냥 살얼음 위를 걷는 것만 같았던 시절을 지나,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에 진심어린 감사를 자아내는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으로 새겨진 흔적을 연필 자국을 지우개로 지워내듯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흔적은 그렇게 언제까지나 옅은 슬픔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오늘도 그렇게 조용히 말을 뱉어보는 성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