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 혹은 공명

“a letter left unsent “

by 이써니

시간은 흘렀고, 나는 있었다.

그 사실 외에는 말할 것이 없다.


무언가를 원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마저 희미해진 시점부터는

사는 것과 멈추는 것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들릴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해왔을 뿐이다.

공명을 들어줄 사람을 원했으나 그마저도 내 이기심이라던 그의 말에 애써 웃어 보였다


다정한 사람들 속에서도 종종 공기가 되었고,

사랑하는 순간조차 침묵이 편했다.

무엇을 말해도 끝까지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은 대체로 맞았다.

그냥 내가 안타까운 쪽이 되는 게 편했다

그럴수록 내 자존감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모른 채


그래서 오해받는 편을 택했다.

차라리 시끄러운 오해가, 조잡한 동정보다 견딜 만했다.


살아 있다는 건 자리를 지킨다는 뜻이었고,

그 자리는 늘 여백이었다.

채워지지도 않았고, 비어 있는 줄도 몰랐고,

그러다 시간이 지났다.


무너지는 방식은 다양했지만,

내 방식은 늘 조용했다.

예고도 없었고, 설명도 없었고,

그래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에게도 길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말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 취급을 받기보단 미안해가

쉬운 방법이었다.


기억되지 않아도 된다.

나라는 이름보다 오래 남을 건 없었다.


다만 이 문장이

존재했던 적 없던 사람의 마지막 흔들림처럼

어디선가,

아주 잠깐,

가볍게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그것으로

나는 증명되지 않더라도

존재했던 것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 파열 없이 사라지기를 택한 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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