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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_퀴어(1)

함께 살아가야하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뮤지컬 〈레드북〉의 넘버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에서 주인공 안나가 세상을 향해 목놓아 외치는 구절입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안나는 넘쳐나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약에 부딪힙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말이죠. 하지만 안나는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합니다. 기꺼이 새까만 얼룩을 자청하는 안나는 티 없이 맑아 보이는 세상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고요하다고만 여겨지던 세상, 그 이면에는 사실 수많은 이들의 존재가 그 자체로 송두리째 부정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뮤지컬〈레드북〉포스터 ⓒ뮤지컬 레드북 인스타그램(@musical_redbook)


    여러분의 세상은 어떤가요? 그저 티 없이 맑기만 한가요? 여기, 보이지 않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실재하지만 쉽사리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 그리고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 이 세계에서, 설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퀴어(queer)’. 시스젠더 이성애자를 제외한 수많은 성소수자들을 우리는 퀴어라고 부릅니다.      


......젠더요그게 뭐죠...?.” 

퀴어동성애자*천 씨?”      


    시스젠더가 뭔지 모르겠다고요? 퀴어의 뜻을 동성애자로만 알고 계신다고요?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나를 설명하는 언어를 애써 찾지 않더라도, 아니 나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그대들의 세상은 티없이 맑기만 하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밖에 없다고 규정되는, 그리고 이성애자가 아니면 동성애자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분법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저와 함께 속속들이 들춰봅시다.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     



    성정체성(gender identity)이란 ‘스스로 인식하는 성별’을 말합니다. ‘태어날 때 사회로부터 지정된 성별’인 지정성별과는 다른 개념이죠. 남자로 지정됐지만 본인의 성별이 여자라고 느낄 수도, 혹은 여자로 지정됐지만 본인이 성별을 남자로도 여자로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성정체성과 지정성별이 일치하는 사람을 시스젠더(cisgender), 성정체성과 지정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고 부릅니다. 트랜스젠더의 경우 성정체성에 맞게 성전환 수술을 하거나 법적 성별 정정을 신청하기도 합니다. 이때 수술이나 성별 정정의 여부가 트랜스젠더 여부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성소수자 용어 : 기본 오브 기본 ver.4 ⓒ유튜버 JLIPS x 마성의 게이 블로그



    성별에는 남성과 여성만 있지 않습니다.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성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논바이너리(nonbinary) 혹은 젠더퀴어(genderqueer)라고 합니다. 두 표현은 혼용되는데, 논바이너리는 성별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나누는 이분법적 구조를 탈피하고자 할 때, 그리고 젠더퀴어는 ‘이상한’, ‘색다른’ 등의 뜻을 가진 ‘퀴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정상적’인 성별이라고 여겨지는 남성과 여성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됩니다. 이외에도 에이젠더(agender, 젠더가 없음)안드로진(androgyne, 남성과 여성이 혼합된 성별) 등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성지향성(sexual orientation)이란 ‘성적 끌림의 대상’을 말합니다. 그 대상이 이성이라면 이성애자(heterosexual), 동성이라면 동성애자(homosexual), 그리고 두 가지 이상의 성별에 끌림을 경험한다면 양성애자(bisexual)로 구분되는 것이죠. 성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성지향성 역시 종류가 무궁무진합니다. 모든 성별에, 또는 성별에 관계 없이 성적 끌림을 경험하는 사람은 범성애자(pansexual)입니다. 또한 무성애자(asexual)는 어떠한 성별에게도 성적 끌림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죠. 이외에도 강한 감정적 친밀감을 느껴야만 성적 끌림을 경험하는 반성애자(demisexual), 성적 끌림을 거의 경험하지 않는 회색무성애(graysexual) 등이 존재합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어떤가요? 처음 듣는 이야기 투성이신가요?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미약하게나마 설명하는 각종 용어들이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글을 읽은 누군가는, 드디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했다며 기뻐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남녀 이분법이 만연한, 그리고 모두가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상정된 이 세상에서 퀴어는 일생 내내 끊임없이 자신을 내려놓고 세상과 타협해야 합니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를 위한 공공 화장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 한국에서는 동성끼리 결혼을 할 수도 없죠. 반복되는 무기력한 상황에서 지친 퀴어가 움츠러드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자연스레 이들은 비가시화되고, 사람들은 이 세상이 ‘티없이 맑다’고만 여기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퀴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버젓이 우리의 곁에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겪어보지 않은 삶을 속단하고 평면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에겐 당장 눈앞의 현실이고, 누군가에겐 생존의 문제니까요. 그래서 팀 UNIVERSE는 기꺼이 ‘새까만 얼룩’이 되려 합니다. 티없이 맑은 세상 이면에 존재하는 이들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이들이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거대한 장막이 세상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장막이 조금이나마 걷혀지도록 끝없이 고민할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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