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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Mar 26. 2024

마지막 보고서 7

한반도실행계획 160

두 대통령이 정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간 며칠 후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시간을 이용하여 검정색정장을 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금수산태양궁전에 나타났다.

정 위원장이 그의 직계가족들과 소수의 측근들만 대동한 채 전격적으로 주석궁을 방문한 것이다.

나란히 선 백색의 두 대형 동상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이들은 복잡한 심경으로 참배에 나섰다.


정 위원장의 바로 뒤에서 진숙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서있던 부인이 최대한 자제하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부인의 이 소리가 그렇잖아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다.

진숙은 극도로 허약해진 부인이 혹여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부축했다.

진숙에게 기댄 채 위태롭게 걸음을 떼던 부인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지금 부인은 정 씨가 며느리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육신의 한계를 이겨내는 중이다.


짧은 동상참배를 마친 일행들은 앞장선 정 위원장을 따라서 더욱더 숙연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실제로 북한의 제1,2대 통치자들이 잠들어 있던 금수산태양궁전의 가장 중심부 영생홀이다.

부인을 부축하면서 정 위원장과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영생홀로 걸어 들어던 진숙은 미세하게 조종된 공기의 온도차를 느낄 수 있었다.

낮게 깔린 조명의 시각적 효과까지 가중되면서 스산함을 느낄 정도의 찬 온도가 몸 전체를 파고들었다.


서너 발짝 정도 앞장선 정 위원장이 먼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대형 유리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뒤를 진숙의 오른팔에 의지한 채 겨우 걷고 있던 부인과 자녀들 여동생 정숙이 뒤따랐고 또 그 뒤를 네 명의 국정자문위원들과 곽 사령관이 따르고 있었다.

정 위원장이 한발 한발 가까이 다가가 유리 관속에 모셔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던 순간 그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복받치듯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몇 달후면 할아버지의 40주기다. 할아버지가 세운 이 나라에서 40주기를 할 수 없게 된 이 참담한 상황이 서글펐을 것이다.


정 위원장의 통곡 소리는 그렇잖아도 서러운 감정들에 짓눌려있던 사람들의 감정보따리를 한꺼번에 터트리게 하는 마중물이 되고 말았다.

영생홀의 장내는 가슴까지 들썩이면서 격하게 통곡하는 소리로 긴 울림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진숙은 부인을 그 자리에 그대로 앉게끔 유도했다.

부인의 탈진을 염려하여 더 이상의 체력방전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진숙의 고육지책이었다.


할아버지의 시신을 감싼 유리관을 어루만지며 한동안 그렇게 통곡하던 정 위원장이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버지의 시신이 누워있던 유리관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누구보다도 한결같이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아버지였기에 할아버지와 비길 수 없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유리 관속에서 굳이 환한 표정으로 누워있던 아버지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정 위원장은 말 똥 같은 눈물을 끝도 없이 흘렸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고 회한의 표정이 아닌 밝은 모습으로 울고 있었다.


오래전, 장군님이라 불리던 정 위원장의 아버지는 영생홀에 잠들어있던 그의 아버지를 참배한 후 함께 온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향후 자신은 죽어서 유리 관속에 들어가는 것이 끔찍하게 싫지만 공화국의 단합과 안정을 위하여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아버지 장군님의 소임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아무 걱정 마시고 자연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쉬십시오!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죄송합니다"


눈물로 범벅된 정 위원장이 무릎 꿇은 자세로 울음을 터트리자 뒤에 서있던 일행들도 모두 무릎을 꿇고 통곡소리를 이어나갔다.

지금 정 위원장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비장함과 소회의 감정이었다.

3대에 걸친 정 씨 왕조가 최종적으로 막을 내림에 따라 더 이상은 이곳에 모실 수 없게 되었다는 죄송함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편히 자연으로 보내어 드린다는 감정이 복합된 눈물이었다.


오랜 세월 답답한 유리 관속에 누워있어야 했던 것이 어찌 망자들의 뜻이었겠는가!

자신이 세우고 대를 이어온 왕국이 자식과 손자대에서도 유지되고 번성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죽어서도 도움을 주고자 했던 고통의 감내였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조명등 아래에서 온전하게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죽음은 보통 고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야 고단했던 유리관 속에서의 잠자리를 청산하고 편히 쉴 수 있는 대자연의 안식처로 돌아가게 되었다.  


진숙의 어깨에 의지한 자세로 힘겹게 걸음을 떼던 부인이 시할아버지의 유리관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절했다.

부인의 뒤를 이어 한 명 한 명 유리관을 어루만지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작별인사를 고했다.

부인이 시아버지가 누워있던 유리관으로 이동하는 사이 두 차례나 다리에 힘이 빠져 걸음을 멈추는 아찔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때마다 뒤를 따르던 시누이 정숙이 재빨리 다가와 진숙과 함께 부인을 부축해 주었 기운을 회복할 때까지 안타까운 시선으로 기다려주었다.

부인이 시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허리 깊숙이 절을 올릴 때에도 정숙이 진숙의 맞은편에서 부인의 오른팔을 잡아주었다.

두 사람의 부축으로 시아버지를 향한 며느리로서의 예를 다할 수 있었던 부인이 또다시 나지막한 소리로 흐느끼자 정숙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함께 따라서 흐느꼈다.


진숙도 밝은 표정으로 누워있는 유리 관속의 장군님을 내려다보았다.

죽은 자에게 영혼이 있을법하지는 않지만 지금 진숙은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 두 영혼의 안도하는 환영을 보는 듯했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죽음은 산자들을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장군님이라고 불렸던 북한의 제2대 통치자는 자식대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기꺼이 방부제를 뒤집어쓰고 유리 관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부한 시신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정 위원장과 정숙의 표정을 통해서 이제야 자연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된 자식들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산자들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저만치서 대기하던 자들이 다가와 그들의 소임을 시작하려고 했다.

모두 네 명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가장 먼저 취한 행위는 정중한 자세로 죽은 자에게 묵념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행위는 죽은 자의 신분 따위와는 무관하게 누구라도 공평하게 예우하는 일종의 관습으로 보였다.

정 씨 왕국을 창업했던 제1대 통치자의 유리관 뚜껑부터 조심스럽게 치워졌다.

오랜 세월 참으로 답답했을 유리관을 벗어난 죽음이 자연의 향기가 배어 있는 나무 관으로 옮겨졌다.

그 순간 강력한 방부제에 의지한 채 억지로 유지되던 피부의 탄력은 자연의 산소를 만나게 되자 이내 자연의 모습으로 변색되었다.

이제야 마네킹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었고 자연의 일부가 될 준비를 서두르는 듯했다.


숙련된 기술자들의 작업속도는 대단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변색된 시신을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였다.

어느새 제2대 통치자의 시신도 나무 관으로 옮겨졌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목관을 둘러싼 붉은 천에는 목란과 무궁화들이 사이좋게 수놓아져 있어 한반도의 절반이 아닌 통합된 대고려의 대지에서 영면에 들것임을 예고했다.


상윤과 규태가 혹시라도 정 위원장이 다른 생각을 은 것은 아닌지 진숙을 다그쳤을 때도 진숙은 일관되게 정 위원장의 마음은 아무런 변함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진숙이 곁에서 지켜본 정 위원장의 고민은 통일을 후회하는 그런 류의 고민이 아니었다.

통일이  이후로도 화학적인 결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연방내부 문제의 극복을 위한 대승적인 고민으로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진숙의 마음 한편에서는 자신이 놓치고 있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두 대통령이 관사를 다녀간 후 정 위원장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진숙은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진숙의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안도의 마음으로 급변한 것은 바로 이 문양을 보고 난 직후였다.

대고려연방의 국화가 새겨진 무명천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목관을 감싸자 진숙의 모든 두려움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두 개의 목관을 실은 차량은 극비리에 오봉산 봉사사업소에 도착했다.

화장장의 몇몇 필수인력들만이 입구에서부터 정 위원장 일행을 맞이했고 번잡한 절차들은 일체 생략되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목관을 실은 이동용 기구 두 대가 충분히 달구어진 시신 소각장을 향해서 천천히 이동했다.

관속에 누워있던 두 죽음은 그들이 남긴 명성에 비해서는 말도 안 되게 소박한 절차 속에서 칠백 도를 상회하는 뜨거운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죽었지만 산자의 모습으로 참으로 고단한 시간을 보냈던 죽음이었다.

이제서라도 이승에 남겨두었던 마지막 흔적을 대자연으로 되돌려주려는 엄숙한 의식이 시작됐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 거추장스런 육신은 모두 태워졌고 미세한 가루만이 항아리 속에 남겨졌다.


정 위원장과 정숙이 각자 자신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뼛가루가 담긴 항아리를 하나씩 받아 들고 차에 올랐다.

동이 트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시각, 

이 비밀스러운 행사에 참석했던 이들은 몇 대의 차량에 분산되어 달려가고 있다.

그곳은 바로 그들의 정신적 고향 백두산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먼지 펄펄 날리는 갑무경비도로를 따라서 거침없이 달려온 차량의 행렬은 장군봉아래 주차장에 당도하고서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차량에서 내린 일행들은 대고려연방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향해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이번에는 정 위원장의 자녀들이 각자 자신들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고이 모셔가고 있었다.

하늘에선 청명한 하늘 사이로 새하얀 구름들이 춤을 추며 지나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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