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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pr 27. 2024

어느새 이순(耳順)이다

눈 깜빡할 새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을 지나오더니 어느새 이순이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예순 살부터는 생각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곧바로 이해가 된다고 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냐고?


당연히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자님의 말씀인지라 굳이 한 번쯤 세밀하게 살펴본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라던가, 사물의 실체를 가리던 은유적인 표현을 가려내는 능력이라던가,

현대과학이 밝혀낸 우주만물의 운행 원리 등 굵직굵직한 테마들에 대해서는 웬만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럼 도를 통하였냐고?

에이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고 다만 선현들의 말씀은 얼추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측면이고 실생활에서는 언행 일치가 안되다 보니 오히려 아둔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우리 집 마당의 평상에 앉아서 조용히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였다.

새까만 얼굴에 빡빡머리를 한 이웃집 꼬맹이 녀석이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민다.

무례하게도 책의 겉표지를 만지작거리더니 깐죽대듯이 하는 말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할배는 이런 책이 재밌나? 이런 재미없는 책을 뭐 하러 읽는데?"

마을 선배의 손자 녀석은 이제 갓 초등학교 5학년이다.

가끔씩 우리 집으로 놀러 와 나의 말벗이 되어주곤 하는데 무료하던 시간에 엔도르핀을 샘솟게 만드는 대단히 반가운 손님이다.

"할배 나이쯤 되면 너도 이런 철학책이 재미있을 때가 있을 거야,

야 이 놈아! 너 오늘 세수도 안 했지? 토요일이라고 눈에 눈곱도 안 떼고 돌아다니냐?"

손에 잡히는 대로 물티슈 몇 장을 빼어 들고는 눈곱이며 얼굴을 야무지게도 닦아주었다.  


"할배 할배! 그럼 할배가 저 책을 다 읽었으면 잘 알겠네, 죽음이 뭔데?"

"음 죽음이 뭔가 하면 말이야, 그러니까 그냥 사라지는 거야"

"그냥 사라진다고? 뿅 하면서 어디로 사라지는데?

아하 알겠다 목사님 말대로 천당으로 사라지는 것 맞제?"

"아쉽지만 천당이나 지옥 같은 것은 없어!

우리 사람뿐만 아니라 강아지도 고양이도 죽으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야"

"앵! 천당이 없다고, 그럼 목사님이 내한테 공갈친 거가?

아니면 할배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척하는 거가?"


난 당돌한 꼬맹이 녀석의 머릿통을 쓰다듬어주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실제로는 없지만 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때 얼마나 슬퍼겠어?

그런데 몸은 죽었지만 영혼은 새로운 동네로 이사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슬픈 생각들이 많이 사라지지 않을까?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천당 이야기를 꾸며냈던 거야"


"할배 말이 맞네! 작년에 우리 집 강아지 하늘이가 죽었을 때 내가 땅에다 묻어주면서 천당에 가라고 기도했거든!"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해? 하늘이가 지금 천당에서 잘 살고 있을까?"

"할배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사람들이 공갈로 지어 이야기라매?"

"바로 그거야!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소망하는 거지,

그래서 인간을 지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거야"

"아하 그렇구나!"       

 

방금 우리 집을 다녀간 꼬맹이 녀석도 단번에 알아듣듯이 죽음의 과학적인 의미와 은유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 슬픔을 달래주려고 은유의 세계관이 창작되었을 뿐 사실은 영면에 들었다는 표현조차도 마땅치 않은 그냥 사라진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비록 심장은 뛰고 있을지라도 뇌사판정이 내려지는 순간 육신의 주인노릇을 하던 자아는 깜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어디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기능을 담당하던 육신의 기계가 더 이상은  기능수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꼬맹이의 표현처럼 뿅 하면서 자아가 사라진 상태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눈시울을 붉힐 만큼 먹먹하게 다가오는 감정이 있다.

20만 년 전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한 이후 해변가의 모래알만큼이나 수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죽었을 지만 따지고 보면 이방원의 시구절대로 이러한들 어떨 것이며 저러한들 어떨것이냐다.

세계사에서 족적을 남길 만큼 위대한 영웅의 삶을 살았다고 한들, 

태어나 지도 못한 채 엄마의 자궁 속에서 사산했다고 한들, 

어차피 지금은 모두 다 사라지고 없을 바에는 그들 간의 차별화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단지 아쉬움을 달래주려고 창작된 이야기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꾸며낸 허상이라 한마디로 그래봤자다.

온갖 종류의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본들 이 또한 미련의 사족일 뿐 죽음으로써 자아는 그냥 뿅 하고 사라지고 만다.

사라지는 순간, 적어도 자아의 관점에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함께 종결되고 마는 것이 대단히 아쉽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냥 사라질 뿐 아무런 미련의 의미조차도 발생하지 않을진대 영웅의 이름을 남겼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이름조차도 짓지 못했으면 또 무슨 아쉬움이 겠는가?

살아서의 명성이 죽은 자에게는 그 어떤 이익도 가져다줄 수 없다면 육신의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라는 말이 과학적인 사실이 된다.

바로 이것이 죽음의 핵심이다.

누구라도 빈손으로 사라져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을 수 있겠지만 아쉬움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진한 아쉬움을 달래고 싶어 몸서리쳤을 것이다.


먹먹하던 감정이 지나가고 고요한 평정심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차이가 사라진 평등한 세상이 펼쳐진다.

찰나의 짧은 인생지난 후 모든 세상이 공평하다는 것은 사실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니 손에서 놓아야 할 것들이 많은 사람일수록 천당이든 윤회든 또다시 살아가는 다음 세상에 대한 염원의 마음이 있었을 테다.

비록 염원이었을지라도 그것을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 안도의 마음이 생기면서 많은 부분에서 평안해졌으리라.  


차라리 이럴 바에는 죽음의 본래 의미를 담백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현실에서의 여생을 보다  의미 있게 구상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이번 한 번의 삶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 인생이라면 그나마의 여생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는 편이 현명한 삶일 듯하다.


이미 아홉 개를 가졌지만 한 개를 더 가지겠다며 아웅다웅 허비하는 인생보다는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널리 베푸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런 사람을 일러서 공자는 이순의 도를 깨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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