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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Jun 21. 2024

과연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까?

시사고발 프로그램 PD수첩을 통해서 오랜만에 접한 허경영氏의 근황은 한마디로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삼만 사천 평 궁궐 같은 하늘궁에서 신(神)처럼 숭고한 사람이라는 뜻의 신인(神人) 행세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어설프지만 물리주의자를 자처하는 입장이다 보니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나 신 천국 기적 영험 등 비과학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흥미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을 재림주라고 하미륵 정도령 신인 뭐라고 주장하던 평생 이런 분들과는 엮일 일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딴 세상 소식일 뿐이다.


물리주의자로서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의 취미라는 축지법과 공중부양은 허무맹랑한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며 신인이라는 주장 또한 명백한 허위 사실이다.

 

이분의 행적을 살펴봤더니 기탁금 문제로 좌절되긴 했지만 대선출마를 시도했던 1987년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각종 선거에 출마하면서 유명세를 탄 것으로 보인다.

개그맨 같은 재치 있는 입담과 기행, 어쨌든 속이라도 시원한 파격적인 공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오랜 시간 한결같은 이러한 모습은 대중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실현가능성을 떠나서 그의 공약은  악의 없는 우스갯소리로 치부하며 경계심의 빗장대신 한 명의 유별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는 사이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세를 바탕으로 만만찮은 팬덤층이 형성되었던 모양이다.


이 분의 생각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사십 년 전부터 신흥종교의 교주를 꿈꾸며 치밀하게 준비한 기획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뜬금없이 웬 신인(神人) 행세를 하게 되었을까? 


전문가의 설명에 따르면 주변을 둘러싼 대중의 환호가 커질수록 자신이 정말로 특별한 존재라는 환상에 빠져든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의 제자쯤을 자처하다가 점차 신의 아들로, 그 도가 지나치면서 종국에는 바로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리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쓸데없는 호기심이 자꾸만 발동했다.

자신의 존재를 신의 반열까지 끌어올리본인들도 내심으로 그렇게 생각할까?


종종 굿판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듯한 빙의상태에 빠진 무당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몰입의 경지를 극한으로 끌어올렸을 때 스스로도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자체를 잊어버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특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신인으로 착각했다면 적어도 대중을 기망하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위기에 편승하여 진실로 자신을 신인이라고 착각하였다면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과실의 죄는 물을 수 있을지언정 사기의 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론 마술공연처럼 몰입상태를 가장한 연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과연 어느 것이 진실에 부합하는 모습일까?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초능력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것 옳고 그름을 논쟁할 하등의 가치도 없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자칭 재림주니 미륵이니 정도령이니 신인이라고 주장하는 역대의 어느 누구도 당당하게 자신의 초능력을 선보일 수 없었던 속사정이었을 테다.


마술은 눈속임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공연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마술사가 아니라 마법사라고 주장한다면 이야기는 180도로 달라진다.

판타지 소설 속이라면 모를까 현실세계에서는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중력을 거스르는 마법사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주장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다만 그러한 주장이 주변의 과도한 분위기에 도취된 단순착오였는지 아니면 치밀하게 계획된 기망행위였는지는 차원이 다른 문제겠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판단은 후자 쪽인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설사 주변의 과도한 추앙분위기 때문에 신인으로 착각을 했다손 치더라도 경험칙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어루만지는 손길 한 번으로 중환자를 완치하  실제로 공중부양이나 축지법을 성공한 사례가 단 한차레도 없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공중부양이며 축지법이며 자신의 이름만 불러도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큰소리쳤지만 명료하게 일반에게 선보인 사실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여러 차례 출연한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정작 변죽만 울렸지 장난기 가득한 행동이나 표정으로 대충 얼버무렸을 뿐이다.

그 또한 중력의 지배를 받는 우주공간의 구성원임을 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순발력으로 이해한.


만일 스스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면 행동의 양식이 달랐을 것이다.

눈속임이라는 한계가 명확한 마술사와는 달리 가령 빙의 상태의 무당이라면 예리한 작두 위에서 춤이라도 추었을 테고, 

비록 판타지소설 속이지만 마법사라면 맘껏 자신의 재주를 뽐냈을 것이 당연하다.


재림주니 미륵이니 정도령이니 신인을 자처하는 초능력자들이 유독 우리나라에만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딱히 사람을 잘 믿는 국민성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폭정에 신음하는 시대상황이라 구세주를 기다리는 사회 분위기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사업적인 마인드로 생각해 보면 어쩌면 꽤 탐나는 영역일 수 있는데 뛰어난 종교사업가들이 많았던 탓으로 판단된다.

개중에는 큰 성공으로 이어져 그것을 본받으려는 아류들이 많아진 것도 한 원인이지 않을까?


현대사회에서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능력은 곧바로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법이다.

처음엔 우스갯소리로 시작한 '내 눈을 바라봐!'가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는 죵교적인 도구로 활용되면서 그는 신흥종교의 교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시대를 막론하고 종교를 사업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가 바로 혹세무민이다.

우주를 통틀어서 중력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물질은 존재할 수 없지만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파격적인 신상품을 선보이려면 고난도의 기술을 구사하는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


가령 재판정에서 진짜로 축지법이나 공중부양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면 보지 않더라도 그 답변의 옹색함이 상상된다.

'한번 웃자고 한 소리를 가지고 너무들 심각하게 받아들이셨네요!'


아직도 혹세무민의 아이템들이 통용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다시 한번 과학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으로 내세가 창작되었다면 거기에 몰입하다 보면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착각에 빠질 수 있음이다.

이럴 때 구세주를 자처하는 자가 달콤한 언어로 다가와 내세에서의 특권을 조건으로 미혹하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계속되는 사회문제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쩌면 종교사업가에게 기망당했다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바로 이것이 팩트다.


과학이 태동하지 않았던 무척이나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던 옛사람들로서는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를 기다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어렴풋이나마 우주의 창조비밀을 알아가는 21세기 빅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유일한 세상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문제는 과학은 과학이고 속마음의 바람만큼은 판이하게 달랐다는 사실이다.


무슨 천국행 고속열차 티켓값인지는 알 수 없지만 1등석 2등석처럼 금전의 크기에 따라서 달리 매입할 수 있다는 발상은 참으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현대과학을 신뢰하는 물리주의자로서 도떼기시장에서나 있을법한 노골적인 상행위가 판을 치는 세태가 어리둥절하면서도 심히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종교와 사업을 원천적으로 분리하는 장치마련을 상상 속에서나마 고민해 보았다.

국가에서 인건비와 종교시설의 운영비를 지원하면서 일체의 금품 수수를 불법화한다면 미자격자들이 종교의 영역을 업적으로 활용하려는 풍토는 많이 사라지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모든 문제의 발단은 죽음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로부터 시작되었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창작한 것은 단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상상 속의 허구임을 일찍이 스티븐 호킹박사는 일갈했다.


죽음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결코 두렵거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닌 온갖 생명체들이 본래의 고향인 흙으로 되돌아가는 담백한 순환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한 번의 인생!

 한 번뿐인 인생!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깔끔하게 종결된다는 의미가 차라리 정감스럽게 다가온다.

사후의 행복이란 것은 과도한 욕심으로 파생된 부질없는 부산물이었을 뿐,

오히려 그것을 내려놓았을 때 그 어떤 천국행보다도 퍽이나 다행스러운 결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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