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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Jul 06. 2024

이별의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장례의식은 인류가 꽃피운 인간문화의 정수가 분명하다.

인간생명을 더없이 고귀하게 여기는 보편적인 공감대가 없었다면 이토록 엄중한 예식문화가 오늘날까지 지켜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팔십사 세의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신 빙모님의 삼일장을 무사히 치른 후 마음을 담아서 위로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말을 구상 중이다.

명색이 브런치작가라는 자존심이 차마 비슷비슷한 도식적인 인사말을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고인의 나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장례식장의 벽면에 설치된 모니터를 바라보며 개별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어림짐작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남겨진 가족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팔십사 라는 사회적 통념은 그럭저럭 수긍이 가는 아쉽지 않은 연세로 이해되었던지 장례기간 내내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평생을 거처한 설봉산 언덕베기의 작은 촌집 마루에 앉아서 빙부님과 함께 아래에 펼쳐진 녹색 전경을 한동안 바라보셨다.  

'참 좋다!'

이 한마디가 인생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는 사실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짧은 문구 속엔 한평생 후회 없이 잘 살았다는 의미와 함께 바로 여기가 지상천국이라는 심오한 의미가 내포된 철학적인 표현이었다.


삼십여 년 전, 가족으로서 처음 인연이 된 이래 다정다감한 데라고는 일도 없는 무뚝뚝한 사위자식을 빙모님은 언제나 살가운 표정으로 대하셨다.

아직도 나를 대하시던 그 환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노부부는 법률이나 규칙이 없더라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만큼 어진 심성을 지녔지만 젊은 시절의 종교적인 신념이 한평생을 남다르게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꾸려진 가정은 지독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방법이 없어 차마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힘겨운 삶의 연속이었다.

자신들이야 스스로 선택한 삶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늘 가슴 한 편이 아린 삶을 살아야 했다.

세월이 흘러 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을 버리고 하나둘 떠나갈 때도 끝까지 그 신념을 지키고자 했던 것은 평생의 삶을 부정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현실적인 여건상 요사이는 병원이나 요양원이 아닌 자택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말기 폐섬유증을 진단한 병원에서는 일 년 가량의 여생을 짐작했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무려 삼 년을 버텨내는 기적의 보여준 후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 불꽃의 심지가 타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토록 급작스럽게 꺼질 줄은 몰랐기에 임종을 목격한 요양보호사로부터 비보를 전해 들어야 했다.

곧장 경황없이 서울에서 부산에서 달려왔지만 장례식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장례시스템은 이미 모바일 부고장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각기 소속된 회사에 보고할 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는 부고장의 성격상 외손주들까지 그 이름이 명시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회사에서 소식을 접한 우리 아이들도 곧바로 외조모의 부고사실을 보고하고 당당하게 삼일의 휴가를 받아서 합류했다.

간단하게 클릭 한 번으로 부고장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날아간다.

그중에서도 부의금의 계좌를 상주별로 각기 따로 명시하는 부고장 형식의 변화는 모바일 장례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준비한 검은색의 상복으로 갈아입는 사이 멀리 부산에서 경기도 이천까지 보내온 근조화환들이 복도의 양편으로 차곡차곡 비치되면서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거리와 시간을 초월하여 착착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바일 장례문화는 코로나기간을 거치면서 완전히 정착된 느낌이다.


어느새 주방에서는 여러 명의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손님맞이 준비를 끝내고 대기 중이다.

도착한 상조물품 중에는 큰 아이의 회사마크가 버젓찍혀 있어 한껏 높아진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을 실감하게 했는데 덩달아서 나의 어깨까지 으슥해진 기분이다.


입관식 때는 생전 처음 죽음을 목격했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다지 두렵지 않은 감정으로 외할머니와 눈을 마주치는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심지어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길로 자라난 손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할머니의 볼에다 입맞춤을 함으로써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지켜보는 이들의 감정을 애잔하게 연출되지 않은 명장면으로 오랫동안 뇌리 속에 기억될 것 같았다.


과거 같았으면 사위는 백관이라 하여 문상객을 맞이하는 상주의 대열에는 설 수 없었지만 지금은 시절이 바뀌어 처남과 함께 문상객을 맞이해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냉방시설에 샤워실까지 갖춰진 상주실에서 하나뿐인 처남과 함께 이틀밤을 새우잠으로 기거하면서 이런저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가족으로서의 애틋한 감정이었다.


장례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찬송가와 기도소리를 들으며 천국으로 직행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진심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현대과학을 신뢰하는 물리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육신을 벗어난 영혼의 존재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자연으로 되돌아갈 뿐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례기간 내내 빙모님이 원하신다면 곧장 천국으로 직행하였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종교적인 믿음과는 별개로 아무런 편견 없이 모두가 참여할 수 있우리식의 장례문화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사후세계에 대한 저마다의 가치관은 다를지라도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예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고인을 위하여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장지에서 하관식을 마치고 삼 일간의 장례절차를 모두 마쳤다.

홀로 남겨진 빙부님이 걱정된 아이들의 엄마는 열흘가량 더 머물다 오기로 하여 아이들과 함께 먼저 출발했다.

내려오는 길에 막둥이의 직장이 있는 천안에 들러 그동안 벼르고 있었던 숙제거리 하나를 해결했다.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루한 양복이 영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참에 전천후 경조사용으로 한벌 마련해 주니 내속이 후련했다.


막둥이를 천안에 남겨두고 내려오는 차량 안에서 두 아이들과 그동안 못 나누었던 허심탄회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다들 결혼적령기라 속 깊은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작정을 하고서 내가 먼저 대화를 이끌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는 빙모님의 하직인사를 다녀오는 길이 가족 간의 끈끈한 연대를 다지는 다시없는 기회가 되었다.


나름 이렇게 저렇게 감사의 인사말을 구상해 봤지만 결국 장문의 인사말이 되고 말았다.

최대한 압축해서 보내야 하는 장례 후 인사말의 성격상 장례식장에서 준비해 주는 기존의 문장과 별반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럴 때 조카딸이 정성스럽게 챙겨준 감사의 인사말이 카톡으로 도착하여 그것으로 대신 보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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