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실행계획 4
“삼일특공대라, 진취적인 기상이 느껴져서 내 맘에도 쏙 드는구먼!
자 이제 해답이 보인다는 그 보따리부터 풀어헤쳐봐?”
“비서관님! 고립된 북한은 미국의 선제공격을 회피할 능력이 없습니다,
일단 선제공격을 받게 되면 양단간의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고요”
“도 아니면 모다, 뭐 그런 말인가?”
“그렇습니다!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들던지 그렇지 않으면 두 손을 들던지!
그래서 선제공격을 회피하려면 북한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고립된 북한은 선제타격의 과녁이 명확해지기 때문에 남북한을 한데 섞어서 과녁을 흐릿하게 만들자는 뜻입니다”
“섞는다! 통일도 되기 전에, 어떻게?”
“미국의 선제공격은 핵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이라는 악당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과녁을 흐트러뜨려서 타격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장 팀장의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윤 비서관이 탁자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을 때 그의 눈동자는 삽시간에 두 배로 커졌다.
“저희들이 내린 결론은 자유로운 이동입니다!”
“자유로운 이동? 어떻게? 누가? 뜬금없는 말 아닌가?
갑자기 통일이라도 하자는 건가?”
“대통령께서 생각하시는 독일통일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장벽을 무너지게 했던 바로 그 사건…”
“그 사건?”
“그날 동독공산당이 결의했던 여행 간소화 행정조치를 염두엔 둔 말씀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 조치의 효력은 다음날인 1989년 11월 10일 새벽 네 시부터 발효될 예정이었거든요”
“그랬지!”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모든 동독인들에게 비자발급의 절차를 간소화해서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파격적인 조치였단 말입니다.
서독뿐만 아니라 이웃한 유럽 국가들과의 국경을 사실상 개방하여 동독인들도 다른 서유럽 국가들처럼 자유롭게 국가 간 여행을 허용하는 조치였는데…”
이제야 윤 비서관은 장 팀장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개량한복을 입은 오십 대의 여주인이 다소곳한 자태로 다가와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나무탁상 위에 투박하게 생긴 머그잔 두 개를 내려놓았다.
수줍게 눈인사를 하면서 돌아서는 여주인의 뒤태는 언제나 기분을 업시키는 어떤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단골손님에 대한 특별한 립 서비스라고나 할까.
이내 두 사람은 코끝을 자극하는 신선한 커피 향의 유혹을 못 이기겠다는 듯 동시에 커피 잔에 손이 갔다.
역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밋밋한 녹차보다는 자극적인 커피가 제격이었다.
이제야 윤 비서관은 허허벌판에서 뭔가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랬지, 맞아! 어쩌면 그 속에 해답이 있을 수도 있겠어”
자신의 사수인 윤 비서관이 장단을 맞추어주자 장 팀장의 목소리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 당시 뒤늦게나마 동독공산당이 여행자유화 행정조치를 결정했던 것은 동독인들의 거센 요구를 들어주는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체제유지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결정은 내릴 수 없었을 겁니다”
“당연하겠지!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줄 알았다면 당연히 그런 결정을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났고 우린 그 결과만을 생각할 뿐이죠,
그날의 장벽붕괴는 그 대변인의 말실수가 기폭제로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서 분석을 해봤으면 합니다,
만일 그때 공산당대변인의 말실수가 없었고 그래서 동독공산당의 여행 간소화 행정조치가 다음날인 11월 10일부터 아무런 혼란 없이 시행되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동독과 서독인들이 평화롭게 국경검문소를 통과하여 자유왕래가 이루어졌다면 이후 독일의 통일과정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가정을 전제로 이미 지나간 역사를 다시 복귀해 보자는 장 팀장의 말에 윤 비서관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당시 동독공산당의 행정조치는 출국지점을 전체 국경검문소로 확대하고 경찰당국에 여행 동기를 제시하지 않아도 서독을 비롯한 외국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대단히 혁신적인 조치였다.
동독주민들의 강력한 해외여행 자유화 요구로 나온 이 조치는 다음날 새벽부터 질서를 유지하면서 시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당시 동독 공산당대변인 샤보프스키는 이 행정조치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여행자유화 조치를 언제부터 시행하느냐는 어느 외신기자의 질문에 우물쭈물 거리는 말투로 지금 즉시 시행한다고 말해버렸다.
공산당 대변인의 어처구니없는 말실수로 인하여 그날 밤 동독인들은 베를린장벽으로 몰려갔고 극심한 혼란 속에서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은 주변 국가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한반도보다도 십 년은 늦게 통일될 것이라고 전망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밤중에 도둑이 들 듯이 통일은 그렇게 불시에 찾아왔다는 어느 노정치인의 회고처럼 독일통일은 예정에 없이 불쑥 다가왔다.
“비서관님! 어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그것도 절호의 기회?”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미국의 강력한 대북 적대시 정책에도 북한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만약 그때 북한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독도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범민족적인 공감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외세의 압박을 우리 민족 간에 잘 협력해서 풀어보자는 정서가 형성되어 있을 때, 바로 이럴 때 과감하게! 신속하게! 밀어붙여야 합니다!”
“과감하게! 신속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40년 전 동독공산당이 내렸던 결정을 북한 당국이 시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한번 설득해 보자는 것입니다.
현재까지도 삼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개성공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통행과 통신 통관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충분한 정도의 시너지효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참에 24시간 전면적인 삼통의 자유가 보장되는 완전한 여행자유화를 밀어붙여야 합니다!”
장 팀장의 이 말은 대단히 공격적이었고 순식간에 윤 비서관의 동공이 또다시 두 배로 커졌다.
“과감하게? 신속하게?”
“네! 북한사람들도 남으로 내려오고 또 많은 남쪽사람들과 외국인들도 물밀 듯 북으로 쏟아져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선제공격의 과녁을 흩트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진정한 통일의 기반이 조성될 수 있을 겁니다”
아직도 절반의 아메리카노가 담긴 투박한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윤 비서관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북한이 동의할까?
흡수통일의 두려움을 과연 북한지도부가 극복할 수 있을까?”
장 팀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확신에 찬 목소리 그대로였다.
“도 아니면 모를 선택해야 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어쨌든 둘 중 하나는 선택을 해야 되겠죠,
초강대국과의 전면전으로 엄청난 결과를 각오하던지!
아니면 흡수통일의 우려는 있지만 국경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여 일단 선제공격을 회피하고 보던지!”
“선택지는 딱 두 가지뿐! 그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시점에서 통일을 말하는 건 좀 뜬금없는 말인 것 같은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장 팀장도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윤 팀장과 시선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긴장도는 머리에서 진땀이 흘러내릴 지경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북한과 대화할 땐 가급적이면 통일이라는 단어는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단지 미국의 선제공격을 회피할 수단으로써 하나의 방편으로서만 여행자유화를 말해보자는 겁니다”
실제로 장 팀장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자 윤 비서관이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장 팀장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흡수통일에 대한 북쪽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자는 뜻이겠지”
장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그렇습니다! 단 우리 내부적으로는 통일의 대장정을 조용히 시작하면서 말입니다”
“내부적으로는 통일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네, 북에는 우리의 심중을 드러내지 않되 내부적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한 부드러운 통일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을 가져보자는 것입니다,
굳이 단계를 나눈다면 제3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1단계는 전면적인 여행자유화 단계이고 이 과정을 통해서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실기하지 말고 지체 없이 제2단계로 넘어가야겠지만 말입니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통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될 텐데 내외부적으로 통일을 선포하는 형식적인 프레임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3단계는 통일의 완전체를 달성하는 단계로서…”
이제부터는 장 팀장도 잠시 여유가 생겼다는 듯 머그잔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제3단계로 넘어가려면 최소 십 년 이상의 숙성기간을 거치야 되겠지만 말입니다,
글쎄요 또 누가 알겠어요? 더 앞당겨지게 될지도…”
이 말에 윤 비서관도 작은 소리로 웃으며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삼통은 아직 개성공단에서도 해결되지 못한 민감한 문제인데,
하긴 선제공격이 임박한 시점에서는 못할 것도 없겠지만 말이야,
과녁을 흩트리기 위해서는 서둘러야겠지만 북한의 동의 여부가 관건이 되겠군,
그리고 그다음의 제2단계라, 그것도 실기하지 않고 지체 없이,
한반도의 통일 프레임으로 선제공격의 표적인 북한의 악마 프레임을 흩트려놓자는 전략인데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군,
그다음 제3단계는 그건 뭐 나중문제니까 급할 건 없겠고”
윤 비서관은 이미 식어버린 머그잔을 감싸면서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던 잔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장 팀장의 이 제안 외에는 달리 뾰족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서 교수님의 말씀처럼 어쩌면 한반도의 위기상황이 우리 민족의 통일을 앞당길 기회가 될 수도 있단 말인가.
정말 기적처럼 이 위기상황을 잘 이겨내었을 때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윤 비서관은 대통령이 자신에게 던졌던 화두가 떠올랐다.
그래서 대통령께서도 이 같은 결론을 미리 예상하시고 내게 숙제를 주셨던 것인가.
윤 비서관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고 무심한 표정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던 선남선녀들을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