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순간 2
과거 윤 비서관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동북공정 이야기가 화재거리로 등장한 후 어느새 방안의 팽팽하던 긴장감은 사라지고 훈훈한 공기로 채워졌다.
윤 비서관은 참으로 오랜만에 백두산 야생녹차의 향기를 맡으면서 그의 장인 배 교수의 채취를 느꼈다.
평생을 고지식한 민족사학자로서 꼿꼿한 삶을 살다가 이십 년 전 장백산천지회의 테러로 죽임을 당했다.
뼛가루나마 백두산에서 잠들기를 원하여 그의 유골을 천지에 뿌려주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정 위원장이 소환했다.
“혹시 편지 내용의 최초 제안자가 윤 선생이신가요?”
예상치 못한 정 위원장의 돌발 질문에 윤 비서관은 머뭇거릴 새도 없이 그렇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정 위원장이 윤 비서관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시 질문했을 때 윤 비서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내 그럴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윤 선생은 현재의 우리 공화국과 당시의 그 나라와는 다르다?
그래서 다 잘 될 수 있으니 까짓것 한번 해보자 뭐 그런 뜻인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이 대목에서 윤 비서관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머뭇거린다면 과거 동독의 실패를 답습할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여행자유화를 제안하는 의도를 의심받을게 분명했다.
확신에 찬 어투로 ‘예’라고 답변했지만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정 위원장이 윤 비서관에게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뭐냐고 따지듯이 묻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직까지는 이 치명적인 논란거리를 자리를 함께한 북측 인사들과 공유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윤 비서관은 지금 정 위원장이 먼저 말하기 전에는 왠지 그렇게 해야만 될 것 같았다.
역시나 윤 비서관에게 더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정 위원장의 태도에서 남쪽 인사들은 크게 안도했다.
사실 윤 비서관 나름으로는 북한 지도부가 듣기 좋은 요식적인 설명거리를 준비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애당초 흡족한 설명이란 불가능하였기에 확실히 치명적인 논란거리가 분명했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다행히 정 위원장의 생각도 남쪽인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했다.
정 위원장이 답배 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들었다.
이때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던 보위부장이 잽싸게 일어나 자신의 라이터를 켜서 정 위원장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런데 시종일관 문 입구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곽 사령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정 위원장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행위 또한 최고 존엄의 신변을 경호하는 자신의 중요 임무인데 감히 박철이 그 경계를 허물었던 것이다.
남쪽손님들을 배려하느라 니코틴의 흡입 타이밍을 놓쳤던 정 위원장으로서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깊게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길게 배출한 정 위원장이 이번에는 다소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쪽에서는 미제가 우리 공화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독도 전쟁 때 우리가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공화국의 핵무력 앞에서는 미제의 항공모함도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정 위원장의 이 말에 북측 인사들이 동시에 파안대소를 하면서 동의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특히 눈물까지 흘리면서 다소 과하게 행동하는 박철 보위부장의 행동은 확실히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남쪽 손님들의 입장이 애매해졌다.
함께 박수를 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난처했다.
남쪽손님들의 난감한 처지를 눈치챈 정숙이 나란히 편 두 손바닥을 무르팍 위에서 까닥이자 장내가 다시 차분해졌다.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이 발언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사람의 지목을 받지 않고서는 감히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경직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래서 그깟 미제의 공격이 두려워서 그 결과조차 예단할 수 없는 이런 제안을 우리가 수용하리라고 생각한 겁니까?”
정 위원장의 방금 이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북측 인사들은 거의 동시에 동공이 커지면서 불문곡직 정 위원장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이 와중에도 그의 여동생만큼은 유일하게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박철은 필요이상의 과격한 표정을 보였다.
바로 이때였다.
무슨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윤 비서관이 정 위원장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대단히 위험한 돌직구 발언을 날렸다.
“위원장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입니다, 인민들을 믿어보시죠!”
정 위원장으로서는 흡수통일의 음모를 가장한 남측의 기만책이라며 적대감을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윤 비서관이 내뱉은 말이 ‘인민들을 믿어보시라’는 말이었으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는 대단히 불쾌할 수 있었다.
자칫 자신의 인민을 불신하는 지도자에게 던지는 훈계로 곡해될 여지도 있었다.
대북특사 자격으로 자리를 함께 하고 있던 최 실장으로서는 방금 윤 비서관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말은 전혀 계획에 없던 생뚱맞은 말이었다.
최 실장은 간담이 서늘해지기 시작했고 얼마나 긴장했으면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편 이번에도 입장은 달랐지만 북측 인사들의 표정이 또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최고지도자에게 불경스러운 태도로 지껄이는 남측 인사에 대한 적대감으로 들끓었다.
그 순간 정 위원장이 왼손으로 테이블을 ‘탁’ 내리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 위원장의 돌발행동에 나머지 인사들도 거의 반사적으로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어간 정 위원장이 담배연기를 패속 깊이 들이마신 후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의외의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으흐흐흐 새로운 길을 가보라!
오직 우리 인민들만 믿고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다시 돌아선 정 위원장이 이번에는 최 실장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난 미제가 일으킬 그 어떤 형태의 전쟁에 대해서도 남쪽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두렵지가 않아요,
미제의 본토가 우리보다 수십 배는 크다고 해도 우린 그들을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할 만큼의 핵무력을 보유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들이 공격해 오면 난 자동적으로 내 책상 위의 핵버튼을 누르게 될 겁니다! 내가 못할 것 같아요?
우리 장군님께서도 날 이 세상에서 가장 뱃심이 두둑한 대장부라고 평가하셨는데 실제로 내 심장은 쇳덩이처럼 단단하단 말입니다!”
최고지도자의 이 말에 이번에는 정숙까지 가세하여 감격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북측 인사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고 이번에도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오버 페이스 하는 박철이 단연 압권이었다.
남쪽의 두 손님들이 이런 어색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을 때 정 위원장이 자신의 집무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파란색파일을 펼친 후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다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인민들의 큰 희생과 우리 국토의 파괴입니다,
미제와 우리 공화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을 치르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전쟁의 결과는 양쪽 모두에게 회복이 불가능한 생지옥을 선물하게 될 것인데 승자가 없는 처참한 지옥을 말입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윤 비서관이 다시 불쑥 끼어들었다.
아직 최고지도자의 말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중간에 끼어든다는 것은 북측 인사들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히 위험한 끼어들기였다.
“위원장님! 남과 북이 힘을 합친다면 전쟁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제안이 과학적으로 백 퍼센트 안전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이 시점에서 남과 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후대에 위원장님께서는 위기에서 우리 민족을 구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받으실 겁니다!”
지금 이 발언은 윤 비서관의 평소 언행으로 볼 때 확실히 과도한 발언이 분명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리낌 없이 흘러나왔다.
뜻밖에도 남쪽인사로부터 민족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극찬의 말까지 들은 정 위원장은 호방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