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순간 3
동이 트기 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차창 밖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남측손님들이 탄 검정색의 세단 승용차는 앞뒤로 보위부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를 쉼 없이 내달렸다.
정 위원장으로부터 명쾌한 확답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려가 계시라’는 말속에서 고민해 보겠다는 대답이 담겨있었다.
남북간의 전면적인 여행자유화 조치는 사실상의 국경개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북의 입장에서는 자칫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모험이다.
상황이 아무리 다급하다 하더라도 결코 쉽사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정 위원장으로서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명색이 북한이 자랑하는 왕복 4차선의 중추 고속도로라지만 관리상태가 부실하기가 짝이 없었다.
움푹 파인 도로를 그때그때의 땜질만으로 보수공사를 하다 보니 전체적인 노면상태가 고르지 않아 확실히 시속 팔십 킬로 이상은 무리였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승용차는 시속 칠팔십 킬로를 오르내리며 한 시간쯤을 내달리고 있었다.
이 밤을 극단의 피로 속에 노출시켰던 두 사람은 몰려오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북녘 땅을 달리고 있다는 경계심 때문인지 옅은 선잠만 반복될 뿐 온전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흐릿한 윤 비서관의 머릿속으로 오늘 새벽녘에 있었던 위험천만한 상황들이 몇 조각으로 나뉘어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만일 정 위원장이 사십 년 전 동독의 실패를 지금의 북한은 되풀이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는 근거를 물었더라면 참으로 난감할 뻔했다.
삼일특공대의 정책보고서에는 자유통행 초장기에는 남북당국의 통제범위를 웃도는 규모의 이동이 이루어지겠지만 차츰 안정을 찾을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삼일특공대는 사만 여명에 이르는 북한이탈주민을 주목했다.
이들은 이미 한국에 정착하여 살면서 광범위한 내부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고향사람들에게 남북한을 비교 설명할 수 있는 능력집단으로 보았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남한에서의 삶은 그들을 치열한 경쟁에서 뒤처진 2등 국민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북쪽사람들의 의식을 냉철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독을 마냥 유토피아로 인식했던 당시 순진했던 동독인들과는 확연히 다를 것으로 진단했다.
비몽사몽간에 차가 커브 길을 도는지 몸이 우측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고속도로를 벗어나 비포장 샛길을 달려갔다.
삼십 여분을 더 달렸을 때 어느덧 이제는 전조등을 켜지 않고서도 시야가 확보될 정도로 어둠이 물러갔고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떠졌다.
차가 한적한 숲 속의 어느 군부대 막사 앞에 당도하자 저만치서 방금 도착한 군용 헬기 한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애써 죽이고 있었다.
이 새벽 안에 서울로 귀환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어떤 협의절차도 없이 예정에 없던 방문지로 들어서게 된 남측 손님들은 본능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불안해하는 남측 손님들을 차에서 내리게 한 보위부 요원들을 따라서 막사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두어 시간 전까지 평양에 함께 있었던 박철 보위부장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두 분 어서 오시라요! 평양에서는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나누었습니다,
나는 공화국의 보위부장 박철이요!”
최 실장과 악수를 나눈 박철이 갑자기 격하게 끌어안는 지나친 친절까지 베풀면서 남쪽손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최 실장보다는 작은 키였지만 단단한 체격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는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인 보위부에서만 잔뼈가 굵은 그의 이력을 잘 말해주었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그가 말한다.
“공화국 대원수님의 명령으로 최 실장 선생한테 직접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 내 이렇게 급히 날아왔지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보위부장이 오른손으로 최 실장의 왼손을 확 끌어 잡더니 순식간에 부대장실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그 사이에 부관 한 명이 잽싸게 문을 닫아버렸다.
졸지에 윤 비서관은 부관실에서 몇몇의 부관들과 함께 대기하는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최 실장과 윤 비서관을 떨어뜨려 놓기 위한 박철의 농간이 분명했다.
부관의 책상맞은편 한켠에 볼품없이 휑하니 놓여있던 철재의자에 앉은 윤 비서관은 순간적으로 걱정이 몰려왔다.
박철 보위부장의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은 십중팔구 최 실장을 통해서 그 자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내려는 의도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대장실 앞은 물론이고 윤 비서관의 주위를 부관들이 둘러싸면서 철통 같은 경계가 시작되었다.
최 실장은 이 새벽에 급작스럽게 발생한 상황들로 인하여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두꺼운 안경 속에 비친 눈알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였다.
최 실장이 비상시를 대비하여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혈압 약을 꺼내고 있었을 때 마침 부관이 들어와 탁자 위에 커피 두 잔을 내려놓고 나갔다.
“최 선생! 그 뭐시기 약이요?”
최 실장이 순식간에 혈압 약을 입속으로 털어 넣자 보위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독극물이라도 먹은 것은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본시 혈압이 일정치 않아서 가지고 다니는 혈압강하제입니다,
갑자기 혈압이 올라와서 약을 먹었습니다”